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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용철 Dec 25. 2021

끝없을 것만 같은 것에 관하여

끝없음에 관하여 (2019)

    로이 안데르손 감독의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고 있으면 마치 회화를 관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나의 씬에는 하나의 쇼트만이 사용된다. 다수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극도로 정적인 화면 안에서 몇 사람만이 움직이며, 그것마저 아주 느리고 조급하지 않게 움직인다. 근경부터 원경까지, 화면의 모든 부분의 초점이 선명하게 맞춰져 있다. 인간의 눈과는 달리 모든 부분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끝없음에 관하여>의 카메라는 응시하거나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영화를 더욱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것처럼 만드는 요소다.(실제로 감독은 모든 것을 또렷하게 그려 대상의 객관적 실재를 파악하려 한 예술 사조인 신즉물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하게 조율된 아름다운 미장센 안에 담긴 것은 바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한 남자/여자를 보았다." 영화는 지금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다양한 장소와 시대를 관통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 앞에 내보인다.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상실했거나, 그로 인해 불안하거나,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로이 안데르손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들의 주된 주제가 인간 존재의 나약함임을 밝혔다. 한쌍의 커플이 날아가고 있는 도시는 한때는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전쟁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가. 잿빛의 도시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은 화면 전체가 무거운 무력감 아래에 놓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의 정지에 가깝게 천천히 운동하고 있는 이 영화는, 마치 상실과 우울의 순간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한참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렇게 스크린을 한참 들여다보면 화면 위의 빈자리들과 그 자리의 공허감들이 눈에 들어온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무엇의 '끝없음'에 관한 이야기일까. 영원할 것만 같은 우울과 무력함, 존재의 나약함에 관한 이야기일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로이 안데르손 감독은 인터뷰에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포착하는 것이 오히려 존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에는 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서사를 갖는 인물인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가톨릭 신부가 등장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불안과 우울이 들어선다고 했던가. 절대적 진리를 상실한 그는 그 자신이 예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고 형벌을 받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 악몽에 시달리는 신부는 결국 정신과를 찾아간 모양이다. 대화랄 것이 거의 나오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의사와 신부의 대화가 이어진다.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죠?"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영원성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유한함과 나약함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존재함의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신즉물주의적 포착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 동일시가 아닌 기묘한 체험을 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장면의 아름다움과 존재의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신비한 체험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나약함을 직시하면서 느끼는 무력감이자, 삶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비로소 포착하게 되는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끝없음에 관하여>의 화면이 획득한 독특한 감각은 이 역설적인 문장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열역학 제1법칙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곧 무력감에서 활력으로 이동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형태를 달리할 뿐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열역학 법칙의 내용을 소년은 시구를 읊듯 소녀에게 들려준다. 모든 것은 에너지로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보존된다. 단지 형태를 달리할 뿐이다. 소녀들의 춤과 같은 활기부터 시간이 흘렀지만 이뤄놓은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노년의 무력감까지. 단지 형태를 달리할 뿐이다. 인간의 존재는 나약하고 유한하다. 그러나 또한 형태를 달리할 뿐 영원하기도 하다. 젊다가도 늙게 되고, 에너지가 모습을 바꿔가며 감자나 토마토가 될 수도 있다. 유한하며 동시에 영원하다. 유한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영원처럼 남을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다. 무력감도, 활력도 모두 유한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감각할 수 있다. 

"환상적이지 않나요?" 
"뭐가요?"
"모든 게요." 

그렇다. 이 우울과 상실도, 아름다움도 모두 환상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외딴 도로에서 자동차가 고장 나 멈춘 남자가 등장한다. 시동을 걸어보지만 걸리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보닛을 열고 뭔가를 만져보지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참을 손보던 남자는 맘처럼 되지 않아 그만두고 싶다는 듯 관객 쪽을 바라본다. 하늘 위로는 영화의 가장 첫 장면에서 날아가던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남자는 잠시 웃어 보인 뒤 다시 자동차를 고치기 시작한다. 삶이란 그렇다. 고장 난 자동차처럼 멈춰버려도, 맘처럼 되지 않아 그만두고 싶더라도 하는 수 없이 살아내야만 한다. 존재란 나약하고 유한하기에 더없이 감사한 지금을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온 도시가 폐허가 될 정도의 우울감과 공허감 위로 공존하는 아름다움의 역설을 담아낸 <끝없음에 관하여>는 끝없지 않기 때문에 끝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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