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미드나잇 인 파리'가 될 수 없었던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는 제목도 아이디어도 십 년 전 영화인 <미드나잇 인 파리(2011)>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낯선 도시에서 밤마다 과거를 체험하는 비현실적인 일을 겪는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엘리'는 패션 학교에 합격해 런던 소호로 온 뒤, 월세방에서 밤마다 1960년대 '샌디'라는 인물의 환영을 보게 된다. 약혼자와 함께 파리에 온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길'은 묘한 답답함을 느껴서 밤거리를 배회하던 중 1920년대로 들어가 동경하던 예술가들을 만난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매일 밤 시간여행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그런데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의 장르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길에게는 현실을 버리고 그곳에서 살고 싶을 만큼 낭만적인 세계와 로맨스가 펼쳐진 반면, 엘리가 보는 과거는 점점 커다란 공포가 되어 엘리의 현실까지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길과 엘리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어 각자의 세계의 장르를 바꿔놓았을까.
엘리가 보고 느꼈던, 샌디를 짓눌렀던 비극을 보며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성매매를 겪고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절망과 분노와 아픔이,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보면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샌디의 삶을 직접 경험했던 엘리는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할 때조차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누가 감히 샌디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이것은 악당에게 서사와 필연성을 부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약한 이의 삶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그래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본 글의 제목은 한강 작가의 소설 '흰'에 나오는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구절과 뮤지션 버둥의 곡 '태움'에 나오는 '죽지 마라, 끝내 살아남아'라는 구절 중 고민하다가 전자를 택했다. 만난 적조차 없는 누군가에게 죽지 말라고 절박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순간이 슬프게도 이 삶과 이 세계에는 많다.
어린 샌디를 죽게 만들었던 세계가 엘리에게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엘리의 세계에 그대로 이어져 있으므로, 엘리와 샌디의 연결은 한편으로 필연적이다. 샌디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몇십 년 뒤 엘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이런 글을 쓰는 건, 그럼에도 샌디와 엘리가 살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그래서일 수도 있다고 혼자 생각해본다. 그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지독하고 징글징글하더라도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나만의 것이 아니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샌디와 엘리가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어쩌면 나를 모르더라도, 나를 향해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