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기차로 버스로 네 시간 남짓 달려 헤이 온 와이에 도착했다. 피터는 웨일스에 자리한 이 도시는 걸어서 20분이면 다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런던 헌책방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낡아 빠진 론리플래닛 귀퉁이에 아주 조그만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세계 최초의 헌책 마을, 헤이 온 와이." 어쩌면 정말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초판본.
영국 일주가 얼추 끝나고 런던으로 돌아가 전 가디언 편집위원이자 타임아웃런던 편집장을 지냈다는 피터 카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트래블 라이팅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세계적인 매체의 편집장과 이쪽(여행 저널리즘) 이야기도 나눌 겸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영국은 어떻게 오게 되었냐는 그의 질문에 제인 오스틴에 대한 사랑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노라 답했다. 제인 오스틴에 꽤 진심인 내게 피터는 영국인으로서 감동했다며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 헌책 마을을 소개해주었다. 어쩌면 내가 그리도 사랑해마지 않는 오만과 편견의 초판본을 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면서.
헤이 온 와이는 듣던 대로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책과 관련된 모든 것과 영국식 전통이 묻어나는 부티크 서점들은 이방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초여름에는 이곳에서 영국 내 유명한 문학 축제인 웨일즈 문학 축제(Hey Festival)가 열려 25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 온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주목받는 마을이 되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한 사람의 노력과 관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많은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은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는 마을의 오래된 소방서에 중고 서점을 열고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62년 일이다. 이후 다양한 콘셉트의 서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을에는 20여 개의 서점이 생겨났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헌책 마을이 탄생한 것. 리처드 부스가 소유했던 소방서의 서점은 이제 파리의 유명한 서점이 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이 서점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파리 체류기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도 언급되었다.-에 영감을 얻어 세워졌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엘리자베스 헤이콕스(Elizabeth Haycox)가 운영 중이지만 최초 설립자의 이름을 딴 서점 이름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렇게 좋은 취지로 탄생한 리처드 부스 북숍(Richard Booth’s Bookshop)은 3층짜리 건물로 된 부티크 서점이다. 특이하고 고전적인 책으로 가득한 이곳은 평일에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서가를 가득 메운 헌책들은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을 방불케했다.
셰익스피어의 1800년 출판 본은 지금까지도 고급스러움이 철철 넘쳤다. 모로칸 양가죽으로 책등을 입히고 책 옆면과 면지는 마블링으로 처리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모습에 푹 빠져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애덤 스미스의 1700년 출간본 외에도 월터 스콧의 유명한 소설 웨이벌리 초판본도 볼 수 있었다. 이런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초판본을 직접 만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달뜬 마음으로 서점 구석구석을 유영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해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통에 혼자서 입을 틀어 막고 큭큭거리거나 1600년대의 책들을 발견하고는 당시 유행하던 제본 방식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종이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짜릿함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조심히 걷는다고 나름 신경을 쓰고 발을 디디지만 오래된 목조 바닥은 특유의 소음을 내곤 했는데 그 마저도 마법처럼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팔랑팔랑 신세계를 발견한 소녀처럼 서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헤이 온 와이 북셀러(Hay On Wye Booksellers)는 그 위치 때문인지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한다. 굉장히 남다르거나 특별하진 않지만 편안함이 느껴졌는데, 방문객들에게 원하는 책을 찾도록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마을에 가면 한번은 꼭 들르게 되는 곳.
모스틀리 맵스(MostlyMaps)는 지도 전문 서점으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1500년대 지도를 소장한 곳이다. 아기 손바닥만 한 챕북도 있고, 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오래된 세계지도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세계지도와는 다소 모양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고. 지도의 세계가 조금은 특별해지는 공간이랄까.
오만과 편견 초판본을 구하려고 마을 서점을 돌며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애디맨 북스(Addyman Books).주로 희귀하고 빈티지한 헌책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찾았다. 제인 오스틴의 1862년 출간본. 권당 최소 250파운드다. 서점 주인은 낡은 컴퓨터에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더니 확인된 바에 의하면 <설득>의 초판본은 영국 내 사우샘프턴에 소장하고 있는 곳이 있고, 가격은 25,000파운드라고 했다. 컴퓨터로 확인되지 않은 책들은 직접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주었는데 정보를 알아내는 것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설득>의 가격을 듣고부터 이미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낙담하고 있었지만 그는 한국에서 지구 반 바퀴를 날아와 영국의 첩첩산중 촌구석까지 찾아온 이방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애를 쓰고 있었다. 연락이 닿는 동안 책을 보고 있으라며 그는 홍차를 내어 주었다. 반드시 책을 팔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어떻게든 알아봐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그 홍차 한 잔에 담겨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오만과 편견>은 56,000파운드, <이성과 감성>은 45,000파운드 정도로 <맨스필드 파크> 등의 초판본은 거의 미국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떨군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더니 편하게 더 있다가도 좋다는 말을 남기곤 그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아 일을 보기 시작했다.
서점 주인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다시 길을 나섰다. 성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주 아담한 헤이 캐슬(Hay Castle) 성을 걸었다. 때마침 열린 700년 역사의 벼룩시장이라는 헤이 온 와이 마켓(Hay on Wye Thursday Market)에 들러 군것질도 하고, 시집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포에트리 서점(The Poetry Bookshop), 골동품을 전문점인 헤이 앤티크 마켓(Hay Antique Market) 등도 두루 들렀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초판본을 살 수 없어 실망했던 마음도 어느새 저 멀리 떠나 있었다. 괜찮다. 19세기에서나 볼 법한 책과 풍경으로 가득한 영국 웨일스의 작은 마을에서 시간 여행자로 보낸 아주 특별한 하루가 선물처럼 남겨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