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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I Dec 13. 2023

혼돈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가, 볼스

괴로움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  

퇴근 후 혼자서 속 시원하게 바닷가 선술집에 찾아가서 일본식 닭튀김과 하이볼 한 잔을 했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달달하고도 취기도는 알코올의 짜릿함이 그야말로 하이볼의 매력이 아닌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너머로 잔잔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질문이 생각났다.

'신이 만일 나에게 다시 10대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직원 두 명을 고용해 놓고도 한산한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어서 남자 사장은 애가 타는 듯 전화기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핸드폰을 말없이 보고 있던 젊은 직원 한 명이 나와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여서 한 마디 건넸다. "이 시간에 사람이 별로 없네요. "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인생살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크면 클수록 세상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사람들과 솔솔 하고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어진다.


그래.. 만약 신이 내게 10대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조금 망설이다가 거절할 거다.


20대로 돌아가게 해 준다 해도 거절할 거다.


나는 지금 현재 이 순간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그 순간이 가장 좋을 것이고, 다음 날은 그날의 그 순간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내일을 깊게 생각한다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내가 어느 나라에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님에게 태어났는지가 중요한 문제일 테지만 이 전부가 동일한 조건이라면, 굳이 입시지옥, 치열한 경쟁과 불안정한 고용과 질투심으로 인해 주변 동기와 동료 뒤통수 후려치는 생활로 돌아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설사 잘 나간다 하더라도 피땀 흘리는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성취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는 승자가 아니라 오만하고 비열한 사람으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살려고 애썼다.



피카소가 보낸 블루 시기만큼이나 내 젊음도 고통과 절망과 불안으로 가득 차 그야말로 혹독한 젊은 시절의 겨울이었기에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다.   


사람 온기 하나 없는 냉엄한 세상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경험하지 않고는 모를 시간..



  


자기 인생을 만족스럽게 여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지나고 나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등의 0.1%의 후회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우리는 살아가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행동한다. 나 역시 어렸을 때 했던 선택을 후회하느라 허송세월로 보낸 기억이 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때의 기억들을 예술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막힌 예술가가 한 명 있으니,


바로 앵포르멜 예술가들 중 한 명인 볼스 <Alfread Otto Wolfgang schulze, 1913~1951) 다.  


'oui, oui oui', 1947


볼스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감금된 경험이 있다. 어떻게 보면 나치가 불러온 전쟁과 고문과 학살이라는 고통 속에서 볼스의 작품읔 실존적 의미를 찾고자 남긴 실제 경험이자 이를 전달하는 기록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이성과 논리를 강조했던 과학적 문명의 발달과 예술은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너지고, 전쟁과 학살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 수치심을 가져왔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형태를 허물고 이처럼 '물질' 자체로 부각하는 장면은 당시 그 자체로 충격적이나, 지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울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과거 시각적 환영을 보여준 전통적 미술 세계와 달리, 촉감적 질감의 효과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앵포르멜 작품) 혼돈과 고통이라는 당시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더니즘의 종말을 불러온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젝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와  볼스와 같은 앵포르멜 회화가 미국과 유럽의 양대산맥으로 선을 긋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결코 의도적이지 않은 우연의 일치라는 게 놀랍다. 전쟁의 충격으로 인해 시대의 세계관이 놀랍도록 변하게 되는 사건 중에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앵(in) 부정한다는 뜻과 포르멜(form) 형태라는 뜻의 단어가 합쳐져 '형태를 부정한다'는 명칭으로 불리는 앵포르멜은 시대의 가치관을 담아 서서히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볼스의 작품은 포트리에(앵포르멜 예술가)와 달리 타시즘(tachisme)이라 불리는 명칭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얼룩을 의미하는 '타시'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두꺼운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서 만든 얼룩과 같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unknown title', 1940s

작품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 이스라엘-하바스 간의 전쟁을 보면서, 20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시간은 마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다름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20대에 겪은 혼란과 청춘의 겨울 때문이라는 생각 덕분인지 그 시절의 고통은 지금의 행복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볼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스스로에게 제안했다.

1) 고통에 찬 과거의 기억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런 작품으로 남는다

2)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많은 것들은 복잡하고 때론 모호하다.

  


'it's all over - the city', 1947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로 폭발하는 듯한 강렬함 힘이 느껴지는 가운데 연상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새로운 출발을 시사한다. 나는 어그러진 형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무정형 속에서 폭발할 듯한 강렬한 힘을 느낀다. 고통과 좌절의 눈물이 남기는 것은 마음의 상처인 듯 해보이나,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살아있다면 또 새로운 태양을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된다. 오늘 살아가는 각자의 삶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앵포르멜 작품은 '승화적'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 같다.




 혼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가 볼스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다가오는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지 몰라도 현재를 살아갈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느낀다.  


눈부신 태양이든, 흐린 구름 속의 그림자로 빛나는 태양이든 어떤 형태로든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오늘은 지나가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시련과 절망 속에서든 내일을 기억하고 그 날이 오는 순간, 현재를 즐겨라.

 

 Si quis deus mihi largiatur ut ex hac aetate repuerascam, valde recusem.

만일 신이 나를 이 나이에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하더라도 나는 한산코 거절하리라.

-키케로 <노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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