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들의 남긴 마음의 그림자
구독자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
잠시나마 이 지구 위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하늘의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해 봅니다. 변해가는 세상의 길목에서 한 해는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네요. 내일 뜨는 태양은 어김없이 똑같이 떠오르는 같은 태양이지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여 2024년이라는 새로운 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득, 왜 인간은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숫자를 붙여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요? 심지어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는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살찐 소부터 시작해 고래 그림까지 그린 역사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 세계관이라는 지도를 세상 위에 펼쳐내면서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생존 본능과 다른 차원의 종족의 보호 본능 같은 게 아닐까요?
땅의 정복에서 시작되는 종족 본능의 욕구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진화해 왔느냐, 또는 퇴화했느냐, 아니면 반복되느냐의 질문 앞엔 하나의 선택이 정답이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미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저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보고 있어요. 철학적인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역사적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미술작품을 다룬 역사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알타미라 신석기시대의 원시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역사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놓는 시대의 역사화, 귀족의 초상화, 때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군중화까지.. 이름 있는 작품명부터 이름 없는 작품명까지 다양하고도 엄청난 수의 미술 작품들이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초상화가인 프란츠 할츠의 작품 중 <즐거운 술꾼>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디에도 초상화 주인공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술에 얼큰하게 취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헤벌쭉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에서 이미 기분이 좋은 그의 감정을 읽을 수가 있죠. 근엄한 표정, 경계하는 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작품 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점은, 사회 계층화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입니다. 이상하게도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 속에는 명실상부한 귀족이나 왕의 초상화도 있지만, 알음알음으로 보존되는 서민들의 초상화도 많이 있습니다. 묘하게도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라면, 단연 서민들의 초상화나 일상 풍경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특징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유언장처럼 인생의 진귀한 풍경은 그들의 시선을 통해 남겨진 미술작품으로 보여줍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은 수직과 수평이 강조된 평온한 풍경화와 인물화가 특징입니다. 부유한 친정 식구 덕택에 어느 정도의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림을 팔아야 하는 화가의 입장에서는 귀족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압박감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장면 묘사와 평범한 의복과 인체 묘사는 그야말로 베르메르의 성품과 고집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이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게 됩니다. 저 역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하나의 의미를 느끼게 되죠.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위풍당당하고 잘생긴 외모의 귀족이나 왕의 초상화는 실제 생기새와 다르다는 설이 참 많은데, 서민들의 풍경 작품은 그런 설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인생을 겸허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 이번에는 냉철한 시선을 담은 예술가의 진실된 마음을 찾아 떠나봅니다. 명예와 가문을 결혼을 매개로 하여 돈으로 팔고 사는 행위가 있을 정도로 인간의 야망과 욕망은 끝없을 정도로 포악해 보이는 장면을 담은 예술작품들도 많습니다. (이런 작품을 '풍자화'라고도 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노예를 태운 선함의 풍경을 그린 작품, 터너의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보험금에 눈이 멀어 선장이 배에 가득 태운 노예들을 쇠사슬로 하나로 묶어 버린 뒤 바다에 뛰어들게 했다는 일화를 담은 <노예선> 작품입니다.
터너는 당시 인정받은 화가기도 했지만, 역사적인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긴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섬세한 붓질보다는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비벼대어 화면을 어찌나 자유분방하게 처리했는지. 자연의 광폭한 힘과 인간의 잔인성을 동시에 느끼게 표현한 터너의 풍경화 작품을 보고 있으면, 터너를 찾아온 어느 화가 지망생의 곱디고운 손가락을 보고 화를 버럭 내면서 "화가의 재목이 아니"라며 문전박대했다는 설화가 떠오르곤 합니다.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은 그저 터너의 작품을 보기만 해도 터질 듯한 흥분과 감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클로드 모네였는데요.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 젊은 예술가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인 터너의 작품을 보고는 충격과 감동을 받고 색다른 작품들을 내놓게 됩니다. 바로 <해돋이>였고, 이 작품은 클로드 모네 인생에서 인상주의 화가의 신호탄을 알리는 시작이 됩니다.
저는 예술가들이 남긴 일상의 풍경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시선을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그런 상상도 해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름을 남기는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SNS도 있어서 얼핏 보면 평등해 보이는 세상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명인과 사진을 같이 찍고 올리는 SNS 계정은 자기 작품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죠. 과거에는 귀족이나 왕이 예술 작품 속에 그려지는 인물로 기록되는 방법도 있겠지만, 때론 한 시대의 사회를 보여주는 위대한 시선으로 남겨진 위대한 예술가의 마음도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남겨봅니다.
2023년 12월 25일을 보내는 모든 이들에게 잠시나마 평화가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