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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07. 2024

보고 싶은 H마트 사람들 #2

시몬과 34불

'보고 싶은 H마트 사람들' 시리즈는 2000년대 중반 미국 유학시절, 캐셔로 약 3년 가까이 아르바이트했던 한인마트 H마트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으며, 100% 실화입니다.




2008년의 어느 날이었다. 사회학 수업 시간 내내 졸기만 하다 일찍 교실에서 나왔다. 가게 정육 코너에서 일하는 멕시칸 아미고 시몬 아저씨가, 시간 될 때 코스트코 한 번만 데려다 달라고 모처럼 부탁한 게 떠올라 그를 불러냈다.


"Que necesitas soy costco?(코스코에서 뭐 필요한데?)"라고 물었더니, 가족 중에 건축업에 종사하는 친구가 있는데 미국에서 드릴 좀 사다 멕시코로 보내달라고 했단다. 멕시코에서 사면 미국에서 사서 붙이는 값 보다 훨씬 비싸다나 뭐라나.


비록 불법체류자 신분이지만, 미국처럼 땅덩어리 넓은 나라에 살면서 차가 없어 일주일 중 하루 쉬는 날에도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시몬 아저씨를 데리고 나오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같이 코스트코에 들어가 구경을 하는데 살만한 드릴의 종류가 너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시몬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Sabes Home Depot?(너 홈디포라는 곳 알아?)" 시몬은 아무래도 홈디포에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배가 좀 고파진 터라 우린 코스트코 피자를 한쪽씩 나눠 먹고는 홈디포로 향했다.


홈디포에 도착해 한참을 돌아봤건만 거기도 드릴 종류가 별로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죄다 18 볼트짜리라 힘도 약하고 가격만 비싸 우린 결국 다시 코스트코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코스트코에 도착해 물건들을 뒤지다 일제 가와사키 제품을 발견했다. 21.7 볼트짜리인 데다 무선에 가격도 저렴했다. 내가 일제는 품질을 믿어도 된다고 하자 시몬도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그제야 만족한 듯 환한 미소와 함께 드릴을 들고 계산대를 향하던 시몬. 갑자기 그의 발걸음이 멈춘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그는 어린 여자아이용 겨울 옷을 파는 코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Por que?(왜?)" 


- "Para mi Niña.'(내 딸 때문에.)"


34불짜리 어린아이용 하늘색 패딩 조끼를 본 순간, 멕시코에 두고 온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눈에 밟힌 모양이다. 불법체류 중인 저임금 멕시칸 노동자에게 34불짜리 아이 옷이 조금 부담이 되었는지,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그에게 애들 옷을 싸게 파는 가게를 알고 있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시몬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우린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제야 나는 오랜 시간 인사만 나눠왔던 그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멕시코에서 열여섯 살짜리 큰 아들과 아주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밑으로는 열두 살짜리 작은 아들과 일곱 살짜리 딸 하나가 있다며, 딸아이에게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옷을 사주고 싶었단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어느덧 시몬네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몬이 갑자기 지갑을 열더니 "Cuanto dollars?(얼마 주면 돼?)"라며 내게 20불짜리 지폐를 내미는 게 아닌가.


하루 동안 내 차가 제대로 쓰임 받는 것 같아 기뻤던 내 맘도 모르고, 자기 딴에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방금 전에 34불짜리 딸아이 옷이 비싸서 포기한 사람이 잠깐 운전기사 노릇 좀 해줬다고 나한테 20불씩이나 내밀다니. 


미국 생활 내내 마트에서 일만 했지, 차 타고 어디 한 번 돌아다녀 본 적 없는 그에겐 꽤나 고마운 하루였던 것 같았다. 무뚝뚝하게 건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다음에 같이 일하는 날 음료수나 하나 쏘라고 하고 그를 떠민 뒤, 냉큼 차를 돌렸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시몬이 선뜻 지불하지 못한 '34불'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날 나는, 내가 기분 내킬 때 아무렇지 않게 쓰는 와인 한 병 값이 한 어린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용 겨울 옷 한 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선물을 쉽게 사주지 못하며 망설이는 가난한 아버지들이 내 바로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이 글을 쓰는 지금 선하디 선했던 시몬의 인상이 떠오른다. 지금쯤은 시몬의 딸도 다 큰 아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나에게 'Hola! Tigre(안녕! 호랑이야)'라고 불러주던 시몬이 그때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란다.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에 비하면 가진 게 많아진 지금이지만, 가끔씩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종종 떠오르곤 한다. '시몬과 34불'에 대해서.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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