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수 Aug 20. 2020

영역표시 인생

2018년 10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내한공연을 위해 방한한 일본인 아티스트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북촌에서 밥을 먹으러 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세상이 빙그르르 돌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후로 한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난생처음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이송됐다. 생명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을 때마다 119 대원들이 계속 질문을 이어줘서 겨우 의식을 붙잡고 또 붙잡으며 살았다. 구급대원들이 각종 수치를 부르더니 내 상태가 심각하다며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사람이 죽어가는 중에도 청각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다더니 의식이 없어도 소리가 들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실감했다. 실신 후 심한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괴로운 와중에 내 인생이 참 별 거 없이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 발생 후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의식이 또렷해졌다. 처음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안 나오더니 한참이 지나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CT와 MRI 결과 뇌나 혈관에 문제는 없는데 그동안 남모르게 쌓여 온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의사 말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실신의 경우 90%는 원인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과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에 있던 일본인 아티스트의 첫 내한 공연을 위해 퇴원 했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상태였으나 있는 힘을 다 짜낸 덕분에 공연은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 일본인 아티스트와 그의 식구들이 많이 놀랐지만 그들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고 무대 위에서 프로다운 연주를 보여주었다.


오늘은 가을 공원에 보리를 데리고 산책을 갔었다. 산책하는 내내 빨갛고 노란 나뭇잎들과 상쾌한 아침 공기가 참 좋았는데 우리 개는 그런 건 아랑곳없이 그저 영역표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창 때인 수컷 개의 영역 표시란 그저 한 두 번 하다 그치는 게 아니다. 몇 걸음마다 계속 반복된다. 산책을 하는 약 15분 동안 수십 번씩 반복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이쯤되면 개에게 있어 산책이란 주인과 함께 하는 즐거운 행사가 아니라 그저 영역 표시를 위한 활동일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축생이나 인생이나 결국 마찬가지구나. 가을 공원의 아름다움은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다른 수컷의 흔적 위에 자신의 것을 덧입히기 위해 부질없는 흔적만 남기다 가는 것이구나.


신이 아마 우리 인생을 보며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아름다운 삶을 선물해줬더니 개처럼 찍찍 영역 표시만 하다 돌아간다고.


매 순간 심호흡을 하며 조용히 살고 싶어 졌다. 산책하듯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동수



(그림: 르네 마그리트의 'Territory')




매거진의 이전글 닭의 목을 비틀어 본 적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