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가끔씩 강아지를 혼내야 할 때가 있다. 해도 되는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가르쳐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알아듣는 것도 아니지만 강아지들 역시 감정이 있다 보니 혼날 때는 자기가 혼나는 걸 알고 기가 팍 죽어서는 큰 눈을 끔뻑거리며 주인 눈치를 본다.
허나 그것도 잠깐이다. 아주 잠깐. 잔뜩 겁먹고 서운해하다가도 강아지들은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자신을 다그친 주인이 야속할 법도 한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어서는 품에 안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혼나거나 속상했던 기억들을 금방 잊어버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다가도 금세 기분이 풀려서는 까르르 웃고 뛰어노는 게 아이들이다.
만약 다 큰 어른이 그런다면 참 속없는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받겠지만 강아지나 어린아이처럼 때 묻지 않은 존재들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가학적, 공격적 자극에 자신의 내면적 본성을 쉽게 매몰시키지 않는다. 마치 방수 코트에 물방울이 잘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늘 그들 스스로의 천성을 유지하고 보호할 힘을 갖는다. 나는 그 힘을 ‘순수함’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왜 갑자기 강아지와 어린아이 이야기를 했느냐면 클래식 곡 중에도 강아지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의 결정체를 담고 있는 곡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이 그렇다. 누군가 내게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사랑하는 곡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꼽는다.
밝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는 1악장. 현과 목관 악기가 번갈아 탱글탱글한 주제를 연주하면 오케스트라가 뒤를 단단히 받쳐주며 건강한 에너지를 사방에 뿜어댄다. 곧이어 천국의 귀한 아이처럼 피아노가 등장해 동네방네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뿌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오케스트라가 피아노를 반기며 와락 끌어안는다. 1악장의 중반부 이후로 곧 닥칠 시련의 힌트들이 단조로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럼에도 피아노는 생기와 기품을 잃지 않고 단단한 카덴차를 노래한다.
2악장이 시작되면 청초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삶에 비극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천국과 지상,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며 피아노의 뒤를 이어 클라리넷과 플롯이 비탄의 애가를 부른다.
2악장은 티 없이 맑기만 하던 아이가 세상에 혼이 난 후 진하게 눈물을 쏟는 악장이다. 투명하지만 또박또박 기록되는 슬픔과 함께 속상하고, 서운하고, 서러운 감정이 도처에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희망의 씨앗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메이저 코드들이 아련하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준다.
보통 이 곡은 2악장이 지닌 처연한 아름다움 때문에 인기가 많은 편이지만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3악장이 시작되면 피아노는 언제 슬퍼했냐는 듯 생글거리며 신나게 달려간다. 마치 주인에게 호되게 혼나고도 기꺼이 주인의 품으로 달려드는 강아지처럼. 엉엉 울다가도 뚝 그치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어린아이처럼.
3악장이 진행될수록 2악장에서의 슬픔을 담은 단조와 1악장의 기쁨이 담긴 장조 코드들이 뒤엉키며 인생의 진한 페이소스를 빚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는 더욱 담대하고 건강하게 삶에 대한 긍정을 풀어낸다. 한 차례 시련을 겪은 이후에도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고, 한층 더 성숙해진 ‘순수함’으로 무장한 피아노가 천진난만하고 자유롭게 달려가는 패시지는 언제 들어도 눈물 나게 감동적이다. 신나게 달려가는 피아노를 피치카토로 응원하며 받쳐주는 스트링,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함께 세상을 긍정하며 노래하는 목관 악기들. 다시 한번 오케스트라가 한데 뭉쳐 건강한 에너지를 사방에 뿜어내면, 피아노가 조를 바꿔 마지막 달리기를 노래하고, 사랑스러움 가득 반짝반짝 빛나는 피날레를 맞는다.
세상에! 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들을 때마다 모차르트가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시도록 순수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천국에서 인류에게 잠시 빌려준 보물과도 같은 작곡가. 어쩌면 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속에 등장하는 피아노 선율은 결국 모차르트 자신의 삶 자체가 아니었을까?
아마 모차르트 스스로도 이 곡을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곡으로 여긴 모양이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을 머릿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작곡해냈던 천재가 이 곡은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완성했는데 이는 분명 모차르트에게 있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이 곡의 카덴차 부분까지 다른 사람이 쉽게 변형해 연주하지 못하도록 악보에 확실히 못 박아둔 걸 보면 모차르트가 이 곡의 완성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삶 속에서 수 없이 반복되는 좌절을 맛본다. 세상에 혼나는 일이 많아질수록 어릴 적 순수함은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우리가 입은 방수 코팅이 조금씩 닳기라도 하는 건지 잔뜩 물을 머금은 옷처럼 축 쳐져서는 낙담과 우울에 한 번 매몰돼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아아, 어른들도 언제 슬퍼했냐는 듯 금방 생글거리며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달려가면 좋을 텐데. 주인에게 호되게 혼나고도 기꺼이 주인의 품으로 달려드는 강아지처럼. 엉엉 울다가도 뚝 그치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세상을 살 수만 있다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속에서 피아노를 아끼고 사랑한 오케스트라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더욱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노래하며, 사랑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Ingrid Haebler (Piano)
Witold Rowicki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녹음: 1965/01 Stereo, Analog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은 지나치게 세련된 연주가 필요하지 않은 곡이다. 나는 이 곡의 명연을 꼽을 때 어느 누가 가장 건강하고 내실 있는 에너지로 연주하는가에 중점을 둔다. 많은 애호가들이 좀 더 진중한 느낌의 연주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칼 뵘과 함께 녹음한 87년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내겐 헤블러 여사와 로비츠키의 65년 녹음이 단연코 제일이다. 언제, 어떤 연주를 들어도 잉그리드 헤블러의 모차르트는 늘 투명하면서 또랑또랑하고 알이 꽉 찬 듯한 피아노 터치가 일품이다. 거기에 더해 에너제틱한 로비츠키의 런던 심포니는 완벽한 템포의 반주로 연주의 완성도를 더한다. 글에서 언급했듯 이 곡은 생기와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중심이 단단해하게 잘 살아있어야 하는데 해블러와 로비츠키의 65년 녹음은 개인적으로 모든 점에서 완벽한 연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