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 '무언가'
시골에 살다 보면 가끔씩 고라니와 마주치곤 한다. 순한 인상에 팡팡 때려주고 싶은 엉덩이를 가지고 동네까지 내려와서는 뭐 먹을 것이 없는지 기웃거리는 고라니를 볼 때마다 한 번씩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고라니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도망갈 뿐 당연히 대답을 할 리 없다.
나는 동물을 참 좋아한다. 누군가 내게 왜 그렇게 동물에게 마음을 쓰냐고 물어보면 나는 제일 먼저 ‘말을 못 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한다. ‘말을 못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물들을 아끼고 사랑해주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때에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안쓰러운 일인가.
혹자는 동물들이 그저 ‘사람의 말’을 못할 뿐 자기들만의 언어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쓰레기를 뒤지며 길가를 방황하는 고양이든, 코뿔소와 싸우다 뿔에 찔려 크게 상처를 입은 수사자든 동물들은 사람처럼 ‘내가 이렇게 세상을 살고 있다’고 열렬히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의 한 세상을 견뎌낼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어서 간혹 전철 안에서 수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세상에 마음껏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누군가의 약함을 보는 순간 측은지심이 발동해 보호해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노래 중에도 그런 노래가 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노래.’
보통의 경우 노래라는 건 가사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의 멜로디를 떠올린다고 치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첫 소절의 가사가 가진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하지만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없는 노래’들이 존재하는데 외국에서는 그걸 ‘무언가(無言歌)’, 영어로는 ‘Song without Words'라는 장르로 표현한다.
노래는 노래인데 말이 없는 노래라니. 나는 '무언가(無言歌)'라는 제목만 봐도 마치 말을 못 하는 동물이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무언가’라는 제목을 붙여 곡을 작곡한 사람들로 가브리엘 포레나 차이코프스키 등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멘델스존일 거다. 멘델스존은 총 마흔아홉 곡의 ‘무언가’를 남겼다. 선하고, 밝고, 슬프고, 서럽고, 연약한 피아노 소품들이 한 곡 한 곡씩 모여 그의 ‘무언가집’을 이룬다. 분명 노래는 노래인데 가사는 없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마흔아홉 곡의 노래들이다.
멘델스존은 살아생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산 천재 도련님이었다. 고작 서른여덟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까지 주로 밝고 아름다운 곡들 위주로 작곡한 탓에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질시 섞인 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무언가’는 언제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피아노 소품집으로 손꼽힌다.
턴테이블에 판을 올려놓고 가만히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듣고 있다 보면 마치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를 마주할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든다. 도무지 말이 없기 때문에 배가 고픈 건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더욱 신경이 쓰이는 고라니처럼 가사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듣고 싶은 노래들이다.
말이 너무 많은 요즘 세상. 불필요하고 불명확한 가사들을 가진 노래들만 판을 치는 시대. 이런 세상, 이런 시대에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듣고 있노라면 애써 표현하지 않고 가만가만히 쓰다듬어야만 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아아, 초코파이 광고 카피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고 더 자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참 좋을 텐데.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Walter Gieseking (piano)
녹음: 1956/9/21-23 Mono
장소: No. 3 Studio, Abbey Road, London
내가 가진 모든 피아노 앨범 중 가장 아끼는 음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발터 기제킹이 1956년에 모노 녹음으로 남긴 멘델스존의 ‘무언가’ 앨범이다. 비록 ‘무언가’ 전곡이 모두 수록된 것이 아니고 부분 녹음이 들어있긴 하지만 이 음반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하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또 세상에서 가장 마음 아픈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치 우리 동네에 내려온 고라니 같은 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