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분명 가치 있지만, 장시간의 노동을 반기는 이는 없다.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는 근무시간은 분명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근래 ‘저녁 있는 삶’이 사라진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서글프다. 슬픔을 줄이기 위해 내가 택한 길은 일찍 출근하는 것이다. 일하는 시간의 절대적 양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칼퇴에 성공할 때 차오르는 쾌감은 강렬하다. 빌딩을 나와 바깥공기를 마시면 이런 생각마저 든다. ‘미션 클리어! 오늘도 나는 성공했어!’ 내게 집을 일찍 나서게 하는 동력은 정시 퇴근에서 오는 짜릿함이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나는 문득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을 하고 있어.’ 내가 생각했지만 너무 섬뜩하고도, 너무 적절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일터로 걸어갈 때마다 곱씹었다. ‘나는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을 하고 있어.’ 하지만 며칠 전 박이강 작가의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를 다시 들춰보다가 저 문장이 내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들리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작품 속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퇴근하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처럼 발리에 왔다.”
박이강 작가는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글을 쓴 사람이다(라고 본인이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 담긴 작품들은 아마도 직장인 박이강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일에 짓눌려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들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과연 그의 문장을 내 것이라 착각한 이가 나뿐이었을까.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혹은 풀타임이든 파트타임이든 오늘날 피고용인으로서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번아웃이란 어쩌다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대가로 견뎌야 하는 증상이다.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는 그처럼 경제활동 인구가 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살짝 포기한 사람들의 피로와 관성을 들여다본다. 이 관찰은 적지 않은 위로를 안기는데, 그러한 피로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버겁다’는 기분에서 비롯하는 죄책감을 상쇄시켜 주기 때문이다.
박이강 작가의 소설을 더 이야기하기 전, 잠깐 앤 헬렌 피터슨의 책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책 <요즘 애들>은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의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일찍이 ‘유동하는 근대’라고 이름 붙인, 지나치게 탄력적이고 유연하여 불안정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정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인간들이다. 이들은 번아웃이 와도 자신이 겪고 있는 게 번아웃인지 모른다. 애초에 번아웃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은 이런 딱한 상황이 결코 개인의 정신력이 문제라거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구조를 직시한다.
이익이 그 자체로 도덕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시장 논리는 해마다 이익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규정한다. 꾸준한 이익 발생, 또는 공동체에 비금융적 배당금을 나눠주는 손익의 평형 상태조차 주주들에게는 가치가 없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건,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자본주의다. 이는 제품이나 제품 뒤의 노동자들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이들을 위해, 단기 이익 창출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다.
...(중략)... 회사가 주주를 위해 창출하는 이익에 대해 대다수의 직원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혜택을 입기 어렵다. 사실 회사 이익의 십중팔구는 노동자가 받는 고통에 달려 있다.
...(중략)...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일과 일상의 피로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은 그게 하나의 요점이다. 주식시장은 평균적인 노동자의 일과 삶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결정들을 딛고 번성한다. 구조조정과 그에 동반되는 해고를 알린 회사의 주가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상승하는 일이 잦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산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비싸고 못마땅한 필수품이다. 노동자들을 최대한 제거한 회사의 가치가 얼마나 치솟는지 지켜보면 알 수 있다. p.183~184
오늘날 ‘N잡러’라고 명명되는 존재들은 부업을 통해 자신의 잠재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피터슨의 관점에서 이들의 서사는 심하게 미화된 것이다. 이들은 하나의 직업으로는 살아남지 못하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노동자)다. 투잡, 혹은 쓰리잡을 밀레니얼의 라이프 스타일이 이자 선택이라 부르는 것은 지금보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하거나, 그들의 상황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게 만든다.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이렇게 불안정은 하나의 현상이 된다. 노동자들에게 형편없는 조건이 정상이라고 납득시킨다. 이 조건에 대항하는 건 스스로 누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 세대의 증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여기게 만든다. 노조의 지원이 있든 없든, 타당한 근거로 제기한 고충들을 배은망덕이라고 치부한다. 그리고 과로와 감시와 스트레스와 불안정을-번아웃을 일으키는 기본 요소들을-기본값으로 만든다. p.195
피터슨은 ‘오늘날 일터가 시궁창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시궁창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작금의 경제 구조가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월스트리트식 업무스케줄은 “끊임없이”, “한계점을 넘어” 노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207),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그들의 꼬리표와 엄청난 돈이 쏟아지는 그들의 성과표는 무한의 노동이 곧 성공이라는, 이제는 버려져야 마땅할 아메리칸드림을 아직 공고하게 만든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빛바랜 관념을 좇아,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다. 문제는 지금의 경제 구조가 노동자들을 인간이라기보다 로봇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돌봐야 할 가정이 없고, 여가 시간은 갖지 않으며, 아프지도 않고, 24시간 일할 생각만 하는 존재.
밀레니얼들은 간절히 갈망하지만 자꾸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안정성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로봇이 되고자 한다. 우리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생물학적 필요마저도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평가 조너선 크레리가 지적하듯, 우리의 수면은 휴식보다는 작동과 접근이 연기되거나 감소한 상태인 기계의 수면 모드와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 수면 모드는 전원을 완전히 끈 상태가 아니다. 다시 켜지는 순간만을 긴장하며 기다리는 상태다. p.211
저자: 앤 헬렌 피터슨/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 수록된 작품들 주인공은 모두 불안에 떨며 24시간 노동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흔들리는 것들”과 “파라다이스 리포트”의 주인공들은 여유로운 직장인이라면 으레 휴가를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각본에 따라 각각 발리와 몰디브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회사원이라는 그들의 정체성, 더불어 그들의 몸에 들러붙은 자본주의적 사고구조, 다시 말해 일종의 ‘돈을 쓰는 소비자의 권리의식’이 그들의 휴가를 망친다. “흔들리는 것들”의 주인공은 자신의 마사지 관리사 하스나와 특별한 사이가 되지만 소비자와 서비스 판매자라는 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결정적 순간, 주인공은 “비행기를 놓쳐서 제때 출근을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재앙”이라고 여기며 하스나의 상황을 외면한다. “파라다이스 리포트”의 주인공은 보다 악랄하고 딱한 인간이다. “월급을 받는다는 건 24시간을 회사에 바친다는 묵계라고” 믿는 그녀는, 회사를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시간을 괴로워한다. 그는 “어떻게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을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하며 자신이 없어도 회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잘 돌아갈 거란 생각에” “공포”심마저 느낀다. 결국 그녀는 잘생긴 호텔 직원 아니쉬에게로 관심을 옮긴다. 그녀는 자신이 회사에 스스로를 바쳤듯, 그가 손님인 본인에게 24시간을 바쳐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니쉬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못하)자, 그의 얼굴 앞에서 “벼엉신”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욕설이 나온 순간, 아니쉬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당신이 뭐라고 하는지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직장생활에 경도되어 있는 건 “흔들리는 것들”과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오피스”의 주인공은 집에도 없는 자기만의 방을 회사에서 갖게 되길 소망하며, “방문객”의 부부와 “디디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은 자본의 미학을 추구하고자 한다. “도시는 밤”과 “무탈”, 그리고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 궤도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되돌리거나 뒤바꾸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도시의 삶에 치인 사람들이 변해가고, 또 죽는 걸 지켜본 “도시는 밤”의 주인공은 “어둠 속에 서 있는 빌딩들이 다 묘비” 같아 보인다고 느낀다. 그러나 기어이 무덤을 안온하다고 여기게 된 주인공은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어디서든 부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한다. “무탈”의 주인공은 다음처럼 생각한다. “오늘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했듯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지.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날들일뿐이다. 무탈해 보인다고 무탈한 건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삶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의 순정한 얼굴만을 보길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으면 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인 이유는, 책에 실린 여러 편의 작품 중 주인공이 유일하게 직장인의 관성적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어느 날 찾아온 은유는 사람이 아닌, 말 그대로 은유적 존재다. 그에 따르면 은유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으로서, 은유를 가진 사람은 자신만의 주관적 해석과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사고하는 자는,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지 않는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제 은유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현실과 살가운 친구가 될 거라고. 내 모국어는 주관이 배제된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소수점까지 눈 밝은 사람이 되어 돈값을 할 거라고. 아니 언제나 돈값 이상을 한다고 인정받고 싶다고.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中-
박이강이 제안하는, 현대인이 로봇이 되지 않는 길은 적극적으로 공상하며 나만의 언어를 장착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보고 그냥 돌덩어리가 아닌 “하늘에서 굳어버린 슬픔”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적어도 그 말을 새겨들을 수 있어야, 우리는 로봇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고 해서 일터의 균열이 당장 봉합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앤 헬렌 피터슨은 보다 구체적인 조언을 건넨다. 그는 우리가 밥값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일을 하고 소비하고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권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번아웃을 떨치고 일어”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316). 생각해 보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존중해야 한다는 피터슨의 말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자는 박이강의 제안보다 더 어렵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내 존재만으로 환대받고 싶다는, 그러나 그러지 못해서 슬프다는 나의 속마음에 귀 기울여보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더불어 나의 이러한 욕망이 결코 뻔뻔하거나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말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가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