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의 주인공 소희는 스스로 저수지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실업고 학생인 그는 졸업 전 취업해야 한다는 학교 규정 및 담임선생님의 강권에 따라 어느 콜센터에 취직한다. 아직 미성년이며 임시직이라는 소희의 위치는 회사가 함부로 부리기에 딱이다. 소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흔적을 따라가던 형사 유진은 그의 죽음이 단순 자살이 아니라 산재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조사가 본격화되자 사람들은 유진에게 반박한다. ‘걔가 원래 집안 형편이 안 좋았어요,’ ‘원래 문제가 좀 있는 아이였어요.’ 그들은 소희의 죽음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의 진술 속에서 소희의 가난과 그가 생전 지녔던 문제들(그에게 발생한 사고와 우울증)은 한 덩어리로 뭉쳐져, 그의 가난은 곧 죽음의 원인이자 여러 문제점의 진원지로 여겨진다. 영화에 대한 개인적 불호를 차치하더라도 가난의 낙인 효과에 관한 한 <다음 소희>는 꽤 정확하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은, 자살과 문제적이라는 단어와 쉬이 직결된다.
정서경 작가는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 ‘요즘 세대에게 돈이 상당히 중요한 것임에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아서’라 밝힌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확실히 요즘 드라마건 예능이건 화면에 그려지는 풍경은 중산층, 더 정확히는 중상층의 삶에 가깝다. 연예인이건 비연예인이건 혹은 가상의 인물이건, 화면 속 인물들은 깨끗하고 넓은 집에 안락한 소비생활을 부담 없이 누릴 수 있는 여력을 갖춘 듯 보인다. 이따금 이들이 언급하는 돈 문제는 현실의 내가 겪는 돈 문제와 조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느껴진다. 정서경 작가가 막냇동생의 수학여행비 때문에 허리를 졸라매는 인주와 인경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까닭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작은 아씨들>의 돈도 그다지 현실적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친한 언니가 횡령으로 20억을 넘겨주는 일 따위는 내 생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무엇보다 급할 때 기댈 수 있는, 돈이 그렇게나 많은 친척이라니?).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문화 전반에서 지워지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미디어가 다루는 빈곤함이란 그나마 형편이 있는 자들의 궁핍이다. 미디어에서 내가 목격한 현실적 빈곤은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 지안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회사 탕비실에서 믹스 커피를 훔쳐 와 그것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돈을 말하지만 가난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SNS에서 사람들은 종종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라는 제목의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는 글을 올리거나, 월 450을 받는 부모가 가난하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글을 올린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그런 글들 속에서 굶주리는 자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떠밀려간다. 우리는 가난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외면한다. 하여 가난은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낙인이 되고, 빈곤은 진짜 빈곤이 아니게 된다.
작가: 안온 / 출판사: 마티
여기 가난을 제대로 말하고자 하는 책 두 권이 있다. 바로 안온 작가의 <일인칭 가난>과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다. 먼저 안온의 책 <일인칭 가난>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가난에 대한 작가 본인의 경험을 세밀히 기록한 것이다. 흔히 자기 계발서가 그러하듯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고, 자신이 가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만을 고백한다. 그는 말한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10)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가난이 사회의 긴급조치가 필요한 응급상황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오늘날 가난은 응급상황이기는커녕 조롱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 사람들은 가짜 가난과 진짜 가난을 나눈다. 이는 가난을 “이유 없는 벌”(69)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잔혹한 상처다.
눈빛은 미간에서 시작했다. 억지로 웃는 입꼬리로는 숨길 수 없는 가난에 대한 혐오가 서린 미간. 눈이 먼 아빠를 부축해 행정복지센터에 가는 날마다 진지함을 가장한 그 미간을 보았다. 직원은 초등학생인 나를 자기 자리 앞에 세워두고 질문했다. 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지난달에 행정복지센터에서 받은 쌀은 진짜 네가 먹었고? 너 진짜 이 집에서 사는 거 맞지, 그치?
그들은 내게 진짜가 맞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가짜’ 가난을 만나면 따지고 싶다. 할 것이 없어서 가난을 도둑질하느냐고, 하다하다 가난마저 진정성 배틀을 붙이는 거냐고. -p.18
안온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정녕 계급은 실존하는데 통념 속에서 가난이 지워지고 있는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꿈보다 현실을 택하는 이들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돈이 그렇게 좋디?’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저 질문은 얼마나 많은 것들, 즉 젊은이의 입장과 사정과 위치를 놓치고 있는 것인가? 돈은 좋아서 버는 것인가? 아니면 벌어야만 하는 것인가? 글쓰기를 꿈꾸었던 안온 작가는 학원 강사로 일하는 와중에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꾸역꾸역 이어갔던 학업은 현실, 아니, 돈이라는 문제 앞에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그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니, 그는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수는 무심하게도 그 선택이 과연 ‘행복하고 현명한 건지’ 물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택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조차 없는 사정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정을 미처 생각지 못하며, 때로는 그럴 마음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도 차려입고 수업에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멀쩡한 원피스를 입고 간 날은 종강일이었다. 갖춰 입은 모습이 보기 좋다던 그에게 일을 해야 해서 결국 학업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다. 그쪽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입니까? (그는 늘 돈 버는 일을 그쪽 또는 그런 방법이라며 지시 대명사로 칭했다.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도 저어된다는 듯이.)
글쎄, 나는 행복과 현명이 저토록 부드럽게 연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과연 행복과 현명이 있는지는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게 멈춘 나의 최종 학력에는 필히 괄호가 붙는다. 문학 석사(수료). p.62-63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학교 교사이자 사회 복지를 공부한 강지나 작가가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여러 청년의 삶이, 오랜 세월에 걸쳐 들려지고 이야기되었다. <일인칭 가난>과 다르게 제삼자의 시선으로 가난이 다뤄지지만 작가 본인이 우려한 바처럼 글에서 착취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정하고 따뜻하다.
작가: 강지나 / 출판사: 돌베개
책에 소개되는 청년들은 각양각색이다. 빈곤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는 이미지가 단 하나로 수렴되지 않듯, 가난을 살아내는 이들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끝내 가난이 낳은, 혹은 그와 직결된 문제를 수습하지만 누군가는 끝내 온전한 문제 해결에 다다르지 못한다. 물리적 결핍이 수많은 결핍을 낳은 까닭이다. 작가는 청년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한 끝에 무엇이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는 동력이 되는지 나름의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노력의 차이’ 라거나 운명론 따위의 해설은 덧붙이지 않는다. 그보다 그가 주목하는 건, 가난이 어떤 문제들을 파생시키는지, 그것은 왜 지속되는지, 거기에 사회의 개입과 관심은 왜 필요한 건지에 대해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 수치에 해당하는 저소득의 문제가 아니고, 그 영향력이 삶의 전반에 미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 실현이 번번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공부하고 싶어도 가정형편 때문에 못 하고, 안락한 주거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지만 항상 불안에 휩싸여 낮은 삶의 질을 경험해야 하고,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 배우고 각성해서 어떤 꿈을 실현하고 싶지만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접해보지 못하는 삶. 또한 이 삶의 패턴이 조부모,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경험하는 삶.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면 사람은 일단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사회적 존엄성에 침해를 입고, 이렇게 침해된 존엄성은 주체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며,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질곡이 된다. 결국, 오랜 시간 축적된 빈곤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고, 거기서 만들어진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행복감을 추구하려는 가능성을 모두 훼손한다. p.260
강지나 작가의 책을 읽으며 생각한 건,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사회적 자본의 부재에 대해서였다. 사회적 자본은 “개인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형성한 정체성, 가치 등과 함께 신뢰, 협력, 상호작용을 통해 집단 안에서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한다(47).” 한마디로 개인의 사회적 입지가 사회적 자본에 해당한다. 강지나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저소득층을 돕는 인프라는 공공부문보다 민간부문에서 활성화되어 있고, 이로 인해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은 ‘시혜적 시선’을 경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빈곤층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다(94). 안온 작가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난이 진짜임을 증명해야 했듯, 그리고 그 안에서 부당함을 느꼈듯, 가난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가난의 탈피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소외계층의 사회적 자본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는 이유다. 다시 에런라이크를 소환하자면, 그는 누군가가 빈곤한 상황을 견디기 때문에 누군가의 풍요가 가능한 것이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이, 가난이 더 많이 쓰이고 팔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