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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주재원 발령으로 필리핀에 와서 지내고 있다. 이곳 대부분 한국인, 아니 외국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집안일해주는 이곳 말로 아떼라 불리는 상주 헬퍼를 두고 생활하고 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실로 놀랍다.
한국에서 맞벌이 부부로 지내면서 그 흔한 도우미 이모님 한번 써본 적 없는 내가 너무나도 놀랍게 이 곳 헬퍼 시스템에 적응해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진심 꼭 필요할까?라고 생각했다. 헬퍼가 주로 하는 일이 청소, 빨래, 설거지라는데 사실 청소, 빨래는 고맙게도 남편이 상당 부분 담당해주었고 맞벌이 부부라 밥 해먹을 일이 많지 않아 설거지 역시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둘째가 태어나고 집에서 전업 주부로 지내게 되면서, 그리고 코로나로 두 아이를 온전히 집에서 캐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집안일이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빈도수를 줄이고 지저분한 것을 조금 감수하면서 그렇게 지내왔기에 필리핀에서도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 오자마자,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주택에 발을 디디자마자 헬퍼는 나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마당부터 가든, 수영장이 있는 2층 집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집이었고 청소라는 것은 좁은 아파트에서 해 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관리 업무였다.
집에 이사한 날부터 헬퍼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니 며칠 만에 이 집에서의 생활이 헬퍼 없이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어느 때 튀어나올지 모르는 벌레 때문에 집 밖에는 나가기가 너무 무서운 나는 집 밖은 오롯이 헬퍼의 손에 맡겨놓고 있는 중이다.
헬퍼한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같이 지내는 것이 불편하진 않을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과연 괜찮을지 등의 고민들은 며칠 만에 아주 사소한 문제로 바뀌었고 헬퍼의 매력에 톡톡히 빠진 나는 돌이 갓 지난 둘째를 돌봐줄 헬퍼를 한 명 더 고용하기로 했다.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었다. 한 명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고 한 명은 아기와 놀아주고 나는 잠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처음 필리핀에 오자마자 낯선 환경에 아이들과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잔뜩 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 이렇게 누려도 될까?"
남편이 처음 필리핀 생활을 시작할 때 해 줬던 말이다. 이 곳에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누리다 가자고. 처음에는 왠지 그 누린다는 말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필리핀에 와서 굳이 한국에서보다 더 아끼고 더 고생하고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주재원 라이프라는 것이 여건 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호화 라이프 같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주 헬퍼, 기사 시스템을 현지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도 불편하게 다가왔다.
아직도 "누리는 삶"에 대해 나 스스로 완전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불편함을 조금 걷어내고 아낄 수 있는 에너지는 아껴서 그 에너지를 내 삶에 의미 있는 다른 곳에 쓰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얻게 된 에너지인만큼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리 다짐해본다.
또한 나의 에너지를 아끼게 (말 그대로) 도와주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지금 이 생활에 젖어 들어 익숙해지게 될지라도 고마운 마음은 계속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