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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랑 Oct 30. 2022

결정했다고 놓는 게 쉬운 건 아닙니다

앞치마를 벗는다는 건

대상포진 이후, 체념과 동시에 납득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놓지 못한 '미련'은 한가득했다. 퇴사를 생각하게 된 원인도 상완 증후군이 발병하고 건강이 걱정되서였고,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대상포진이었지만 결코 자의적인 퇴사가 아니었다. '만약에'라는 곰팡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나의 미래는 악화된 건강으로 불투명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퇴사의 명목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다. 아무리 극강의 P라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까. 


여전히 미래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미련은 '시간이 쌓인 정'을 토대로 빚어졌다. 다양한 매장을 경험하면서 별의별 손님들과 함께 사건사고가 많았다. 그러니 애정만 있을 순 없지만 사랑보다 무서운 게'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두 자리 혹은 두 자릿수 가까이 근속한 파트너들에 비하면 귀여운 근속기간이긴 하지만 감히 짧은 기간이라고도 부르기 힘든 게 5라는 숫자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직장으로서의 처음인 영향이 컸지만 이렇게까지 유별날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여러 색깔의 앞치마를 입었었다. 보라색, 회색, 갈색, 초록색, 빨간색, 검은색. 형형 색깔로 밑바탕을 깐 위에 검은색으로 모두 덮어버린 후 이쑤시개로 긁어 무지갯빛 그림을 만들 듯 나를 표현하는 색이 때마다 달랐다. 아무래도 일했던 브랜드의 수에 따라 다양하게 입었다. 


그중에서도 떼가 안타는 스타벅스의 검정 앞치마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입으면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건 물론 가장 깔끔해 보였으니까. 특히 스타벅스 사내 제도 중 '글로벌 커피 마스터(Global coffee master)'를 수료하면 앞치마에 별이 생겼고 이것은 개인의 역량의 능력도 인증되는 셈이니 내심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지금은 배지의 형태로 바뀌었고 부착하지 않는 파트너들도 다 수이다.) 


어느 브랜드에서 일하든 "윤랑! 손도 빠르고, 일도 잘하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나에게 스타벅스는 처음으로 사회의 좌절감을 준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처음 입사했던 매장에서 5일 출근이라면 3일은 선임 파트너에게 쓴소리 안 듣는 법이 없었고, 대체 어디서 일했었길래 이렇게 엉망이냐는 소리도 잦았다. 말하지 않는 선임 파트너들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그것이 더 최악이었다. 차라리 어떤 게 문제이고, 더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조차도 뱉을 용기가 없었다.


울컥하는 마음과 동시에 이렇게까지 능력이 모자란 아이였나 싶어 무기력했다. 화장실 체크를 갈 때면 남몰래 눈물도 흘렸다. 쉬는 시간 30분을 입사하고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은 온전히 마음 편하게 쉬질 못했다. 끊임없이 나를 피드백하고 채찍질해도 모자라기만 한 초록색 거북이일 뿐이었다.


친구들은 군대를 가거나, 4학년이 되기 전 마지막 자유를 불태우고 있을 때 사회초년생 햇병아리는 직장이라는 중압감에서 삐약 대기 바빴고, 그것을 거북이 등딱지처럼 하루하루 버텨냈다. 무엇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점장님 아래에서 처음으로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는 '이 앞치마의 무게가 대체..'라는 쓴웃음만이 새어 나왔다. 시달렸다는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직장인이 된 것도 , 체계적인 매뉴얼 안에서 일하는 것도 , 후임으로서 선임자에게 끊임없는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것도 , 울면서 먹는 음료와 샌드위치도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도 쌓여가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처음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첫 매장에서의 10개월을 그렇게 아등바등 지냈다. 


이후 두 번째 매장에 전배 발령이 났을 때는 이미 초록색 로고의 사이렌 언니에게 강한 애증이 가득했다. 월급으로 산 예쁜 사복에 좋은 향수보다 웃든 울든 내 가슴 한편에서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사이렌 언니의 커피 쩐내 앞치마가 왜 더 편하기만 한 건지. 이 앞치마를 벗게 된다면, 분명 다시 만나지 않을 이별일 테고. 이별 후유증이 제법 거셀 것이라는 걸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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