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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Feb 01. 2022

로또 한 장의 여유 / 박브이

로또가 된다면

  언젠가 누군가와 선택의 기준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직장을 고정해두고 사는 곳을 어디로 해야 할 것인지가 구체적인 예시였어요. 익숙한 동네가 가장 좋다든지, 직장 근처로 하되 근처의 시설이 중요하다든지, 정을 붙일만한 곳이어야 한다든지 등 나름의 이유를 갖춘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충이라도 좋으니 우선은 숫자로 환산해보고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근무 시간과 직장에서 받는 급여 등을 기준으로 1시간 또는 10분 단위로 스스로의 시간에 가치를 매겨보자는 것이었지요. 예를 들어 그렇게 계산한 1시간의 가치가 2만원일 때, 출퇴근 왕복 한 시간의 거리에 거주하게 되면 하루에 2만원 씩을 비용으로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럴싸하긴 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구석이 있어 정이 안 가는 의견이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우리가 어떤 구조 안에 살고 있는지를 새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구조 안에서 우리 각자의 시간은 이미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 숫자로 여겨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각자의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가 쓴 시간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여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유는 각자가 시간을 쏟아 얻은 가치에 따라 길이와 질이 달라지고 맙니다. 어딘가 불공평해 보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좋은 여유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의 시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간혹 여유가 아닌 가치에만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여유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치를 얻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진한 나머지 여유를 만끽할 시간이 없거나, 얻은 여유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여유를 통해 스스로의 시간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음에도, 정작 여유를 쓰는 방법을 고민할 여유를 갖는 것조차 어려운 일상을 자주 마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또 당첨과 같은 이른바 ‘일확천금’에 대한 가정은 거대한 가치, 즉 여유가 갑작스레 주어지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의 시간을 바친다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크기의 여유이죠. 가격표를 들춰보거나 다음달 할부금을 걱정하지 않고 사고싶었던 물건을 산다든가,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든가, 소중한 사람들과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다든가 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수록 즐겁습니다.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은’ 여유를 전제로 하기에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가정을 현실에서 이루려면 어마어마한 무리를 해야 하고, 그로 인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여유마저 희생시키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만, 어쩌면 허무해보일 수도 있는 상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여유에 대한 상상의 본질은 그 형태와 규모와 비용이 다를 뿐, 약간의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조금씩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더라도 결국은 스스로에게 충분한 휴식과 다양한 경험을 주고 싶다거나, 주변 사람들을 두루 더 잘 챙기고싶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 게임 한 판, 통화 한 건, 식사 한 끼가 그렇듯이 말이죠. 그래서 로또 한 장 역시,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2, 9, 19, 22, 36, 43번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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