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글 주제를 받고 며칠 밤을 자기전에 제 ‘처음’들을 떠올려봤습니다. 그리고 3초 후 어김없는 이불킥. 어떤 경험이든 처음에 실패했던 일이나, 미숙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냐고요? 제 경우에는 대부분 미숙함을 숨기려고 뻗정대고 버둥거리는 꼴이 자꾸만 생각나서 속으로 ‘그만’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부여되는 아련함은 무슨···.
무엇이든 쿨하게 인정하는 게 멋있는 건데, 처음이다보니 처음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숨긴다고 숨겨도 예상할 수 있듯이 대부분 다 어색했을 겁니다. 새내기 때, 수수하게 다니면 스스로 어린티가 난다고 생각했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은 허옇게, 눈을 벌겋게 하고 세미 정장 같은 옷(수업만 듣고 다시 기숙사 가서 잠이나 잤는데 왜 그랬을까요)에 높은 구두를 신고 종종 거렸는데….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새내기 티가 안날거야’하고 다녔던 10년도 더 된 기억들이 스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봐도 새내기인데 그때 언니들은 제 모습이 웃겼을 겁니다. 껄껄.
‘새내기만의 특권’이라는 만우절 날도 생각납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데 그때의 저는 ‘흥, 새내기인거 광고할 일이 있어? 이 교복을 입는 건 흑역사야’하면서 그날도 만우절 교복을 패싱했습니다. 친구가 너도 입으라면서 부추겼지만 ‘너나 입어’라면서 또 쿨 한 척. 다들 학교 광장에서 교복입고 사진찍고 꺄르륵 거리면서 노는데 그때는 만우절 패싱이 멋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인이 되어서 어느날 학교를 지나치는데, 괜히 씁쓸 하더라구요.. 새내기들이 교복 입고 깔깔 거리면서 사진 찍고 있었습니다. ‘아, 저때가 나름 철면피깔고 교복입는 마지막이었는데’ ‘사진이 나름 추억으로 남았을텐데(물론 흑역사로 떠오르긴 하겠지만)’ 생각이 스쳤습니다.
새내기 쿨병에 걸려 학교 과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기억이 없는 것도 새삼 허전합니다. 그 덕(?)에 학교에서 발이 넓지도 않고, 교수님도 잘 모르고, 무언가 활동을 열정적으로 한 경험이 크게 없습니다. 만학도로 수능을 다시 치지 않는 이상 새내기는 내 인생에 한번 뿐인데, 그냥 새내기를 즐길 걸. 그래도 저처럼 쿨한 척 했던 친구들이 있어서 혼자 놀지는 않았던 건 그나마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기억들이 퇴비가 돼서일까요. 그나마 덜 민망한 ‘처음’도 있습니다. 일하다보면 ‘이 부서에 처음 왔냐’며 고참 기자 선배들이나 출입처 기업 관계자들이 무시하는 일이 잦은데, 거기에서는 다행히 ‘처음이 아닌 척’을 하지 않았다는 게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일하면서 받는 무시도 상당하잖아요. 처음 부서에 발령받고 기사를 쓰려고 전화해서 물어보면 ‘너 바보냐, 그것도 모르냐’하면서 하대는 기본이고, ‘공부좀 하세요’라고 혼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때면 욱해서 다시 ‘저도 다 아는데요?’라면서 처음이 아닌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지만 그럴때마다 ‘나중에 민망해지지 말고 지금 처음인 것을 당당하게 커밍아웃하자’고 속으로 되뇌입니다. “처음이라 잘 모릅니다”를 내뱉고 나면 민망함은 잠시 일하기는 훨씬 쉬워졌습니다. 처음이냐고 윽박지르는 사람 붙잡고 계속 물어보면 욕하면서도 알려주기는 하니까요.
이런 걸 돌아보면, 처음은 처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가 훨씬 편하고 재밌는 것 같습니다. ‘처음처럼 안보여야지’보다 ‘나 처음인데 어쩔거야’라는 마인드를 조금 더 미리 장착했더라면 민망함보다는 재밌는 기억이 조금 더 풍족해지지 않았을까,하며 살짝은 다시 민망해지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