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가 된다면
구매자께 드리는 연하장.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토록 원하는 로또입니다. 임인년 새해도 변함없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여러분께 희망을 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솔직히 저 아니면 일주일 동안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사는 분들 많잖아요. 만지지도 못하는 신보다, 만날 일이 거의 없는 TV 속 연예인보다, 있어도 위로하나 안되는 가족들보다 저를 더 찾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좀 서운한 부분이 있네요. 여러분한테는 아니고 세상한테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여기저기서 제 위상을 끌어내리려는 도전 세력이 한두 개가 아니예요. 어떻게 쌓아온 명성인데,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가도 이런 현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솔직히 제가 뭐가있습니까. 디자인이 예쁜 것도 아니고 영험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제가 가진 건 돈, 돈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치사하게 돈을 뺏어가다니요. 아, 엄밀히 말하자면 제 돈을 뺏어가는 건 아닌데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돈의 힘이 점차 약해져 간다, 이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전에는 저 하나 당첨되면 거의 삼대가 먹고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앞에 자주 붙었던 수식어 기억나시나요? ‘인.생.역.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수식어 붙이기 참 어렵습디다. 제가 똑같이 여러분께 1등 당첨금 20억~30억을 줘도 요즘 그전처럼 인생 역전하기 쉽지 않다면서요.
가끔 여러분 소원을 엿듣습니다. 예전에는 친구들끼리 로또를 나눠 사고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일단 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외제 차 한대 뽑고, 빌딩도 사고, 부모님도 드리고, 애 유학도 보낸다고 줄줄이 읊던데 지금은 좀 간단해졌더라고요. 누가 그러던데요, ‘1등 당첨돼도 강남에 집한채 못산다’고. 그래서 분한 마음에 서울 부동산 시세 좀 봤습니다. 헛소문이면 확 코를 때려주려고 했더니, 이거 웬걸, 진짜더라고요. 최근에 제일 저를 비싸게 나눠 가지신 분이 30억원 정도 당첨되셨는데 그분 강남에 작은 평수 하나 사면 저를 다 써버리시던데요. 저를 받는 대가로 세금 내고 하면 오히려 본인 돈을 더 보태야 할 수도 있겠네요.
2030 여러분은 퇴사하시고 싶어 매주 저를 찾아주시더라고요. 2~3년 전만 해도 제가 여러분 품으로 안기면서 ‘당첨되면 퇴사해’를 속삭였죠. 이젠 저 하나 믿지 마시고 월급도 꼭 놓치지 마세요. 제 당첨금 하나 믿고 있다간 재벌처럼 못삽니다. 그냥 저는 재산 증식의 부스터샷이다 생각하고 소처럼 일하십시오. 요즘에 평균 15억원 정도 당첨되시던데, 15억원은 강남도 못 가요 강북 가셔야 합니다. 아파트 산 양도세랑 세금은 뭐로 내실래요? 월급 중요합니다.
제가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 별것이 다 제 자리를 치고 올라오려고 도끼눈을 뜨고 있더군요. 제일 위험한 건 코인, 그 자식이 참 사람 여럿 망하게 만들어요. 최소한 저를 산다면 손실이 많아도 몇만원 선인데, 그놈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몇억원씩도 헤쳐 드시던데요.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운 좋으면 몇억도 하룻밤 사이에 벌 수 있다면서요. 물론 그만큼 잃기도 하지만, 저보다 더 자주 찾는다는 소식에 질투가 나긴 하네요.
그런데도 아직 저를 많이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역전은 못되더라도 서울에 아파트 하나 마련하는 데 저만한 건 또 없으니까요. 제가 이제 당신들의 꿈의 전부를 이뤄줄 수는 없지만 작은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도 기뻐하겠습니다. 요즘같이 미친 실물과 부동산 물가에, 제가 부스터샷이라도 된다면 이 한 몸 기꺼이 희생하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저는 부익부 빈익빈 사회에서 작은 사다리 정도의 역할은 하고 있는 거겠죠? 이도 저도 도움이 안 되고 속이 답답할 땐 언제나 저를 찾아주세요. 당첨금 쌓아 두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2년 1월 로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