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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an 10. 2022

외길을 이제 조금은 포기해볼까 / 이루시엔

트렌드가 곧 능력?

  여학생에게 동방신기가 최고던 2004년, 나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시달렸다. 학교든 학원이든 믹키유천 마누라와 시아준수 여자친구가 판치던 때였다.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칠판에 영웅재중과 유노윤호, 최강창민 이름을 써놓고 그 옆에 하트와 자신의 이름들을 나란히 놓았지만 나는 ‘꺅 잘생겼다’던 다섯 명 중에 한 명도 고르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동방신기 영업을 뿌리치고 또래 중에서는 ‘성시경’과 ‘비’ 외길을 걸었다. 곱상한 오빠들이 소녀들의 마음을 훔쳤지만, 남자는 이쁘기보다 남자처럼 생겨야 한다(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 둘도 꽤 곱상한 얼굴이다.)는 나의 대쪽같은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대상은 다르지만 최근 몇 년 동안도 비슷한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소외감은 서점만 가면 심해졌는데, 유행이라는 ‘인스타식 작법’에 적응을 못 한 탓이었다. 수많은 인스타 팔로워들의 새벽 눈물샘을 자극하던 “이따금 조약돌을 주웠어. 그렇지 않으면 덥석 네 손을 잡아 버릴 것 같아서. 그런 날이 있었어.”와 같은 문구에 큰 감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감흥이 없다고 하기보다는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큰 통찰도, 큰 감동도 없이 그럴듯한 문구의 나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은숙 작가의 킬링 대사들을 아무런 맥락도, 서사도 없이 쉬지 않고 들어야 하는 느낌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되시려나. 저런 글은 일기장에 적어야 한다고 인스타식 작법에 굳게 마음을 닫았다. 


  나에게 서점이나 출판사는 ‘선비’같은 이미지였다. 세상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이전의 지식이나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이런 인스타식 감성 에세이나 시집은 잠깐 유행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서점에서 알아서 서서히 그 자리를 없앨 것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광화문 교보문고를 빠져나가곤 했다.


  완벽한 나의 오판이었다. 잠깐 유행은 이제 어느덧 트렌드가 됐다. 시/에세이 코너에는 인스타에서 유명세를 얻은 글들이 쫙 깔렸다. 꽤 반응이 좋은 등단 소설가의 에세이들도 내용이 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일러스트나 제목, 문구 등은 인스타식 작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거부감에 책을 살펴보지 않다가도 서점에서 대충 넘겨보면 또 내용은 괜찮았다. 선비와 트렌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때,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이원하 시인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손에 쥐게 됐다. 


  시인이 들으면 불쾌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뭐야, 이제 문학동네까지 이런 제목의 시로 장사하는 건가 싶었다.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는 ‘졸린 데 자긴 싫고’와 같은 인스타 감성 에세이 제목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술자리를 같이 한 교수님이 강력 추천한 시집이었는데, 교수님이 추천한 게 아니었다면 표제시를 보고 시집을 닫았을 것이다. ‘학식이 두터운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건데…’하고 계속 봤다. 


  ‘유월의 제주/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중략)…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중략)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처음 읽었을 땐 인스타 감성 시와 뭐가 다른가 했다. 그리고 뒤를 휘리릭 넘겨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평론을 봤다. “분명히 감정 속에 있는데도 그것과 거리를 조절하며 여유를 구가하는 이런 재능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을까.” 끄덕끄덕. 그래 좀 이 시가 그런 면이 있네. 의미도 있네. 신형철 평론가도 이 시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나 따위가 뭐라고… 추천한 교수님에 이어 신형철 평론가의 권위까지 더해지니 갑자기 이 시집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게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묘하게 재미가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알 수 없는 단어들만 나열해놓은 그럴듯한 시보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서 자신의 짝사랑 남에게 직진하는 천진난만한 시인을 조금을 알 것 같았다. 이게 시(詩)며든건가. 작가 인터뷰를 섭렵하고 작가가 쓴 산문집까지 주문을 넣었다.


  그래, 나는 권위에 약한 사람이었다. 동기가 권위든 무엇이든, 어쨌든 이 경험은 인스타 감성이 조금만 묻어있어도 배척하고 오해하기에 바빴던 내가 조금은 그 범위를 넓혀준 경험이었다. 고정관념 탈피라고 하겠다. 이제는 그전보다 조금 여유롭게 책을 볼 수 있게 된 느낌이다. 물론, 감성 범벅인 인스타식 책은 여전히 싫다. 이 시집은 그런 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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