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상권
좋아하는 것은 많지만 그중 ‘덕질’이라고 말할 만한 건 딱히 없었다. 좋고 싫음은 꽤 명확한 편이라도 좋아하는 것 중에 단연 으뜸을 꼽으라면 주저하기 십상이다. 덕질의 대명사인 연예인도 그렇다. ‘연예인이 좋아서 돈을 써야 할 정도’가 연예인 팬의 기준이라면, 그 누구의 열광적인 팬도 되어본 적이 없다. 특정 연예인에 빠져 유튜브를 찾아보더라도 길어야 한 달이었다. 꾸준히 좋아하고 준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게 스스로 내린 덕후의 기준인데, 거기에 부합하는 일화도 크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도 책 몇 권을 읽다 보면 흥미가 떨어지고, 덕질하고픈 브랜드는 지갑 사정으로 인해 덕질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덕질이 없으니 ‘덕업상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 생각했다. 유튜브에서 말도 안 되는 제목의 클립을 주워보고 티빙을 결제하기 전까지는. 전 애인과 한집에 살며 다른 사람과의 로맨스를 꿈꾸는(물론 그 전 애인과의 재회 로맨스도 가능하다) 연애 리얼리티라는, 한국인 정서에 충분히 기괴한 ‘환승연애’에 그토록 빠지리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6월부터 10월까지 3개월이 넘게 매주 금요일을 기다렸고, 마지막 회를 라이브로 송출하겠다는 말에 일하면서도 몰래몰래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렇게 무언가를 몰입해서 충실히 본 건 환승연애 말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빠른 전개와 충격적인 스토리라인으로 나를 다시 TV 앞에 앉게 만들었던 ‘스카이캐슬’도 마지막화를 그토록 챙겨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덕업상권을 충실히 실천했다. 방영 초기, 나름 국내에서 파격적인 설정으로 인해 꺼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는 물론 어색한 회사 선배에게까지 ‘이토록 인기인 환승연애를 아직도 안보는 것이냐’며 시청을 종용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고 자극적일 것만 같은 프로그램을 보느냐’고 한심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목요연하게 나만의 ‘환승연애를 볼 수밖에 없는’ 논리로 맞서기도 했다. “아, 이거 연애 좀 해본 분이라면 분명히 공감하신다니까요? 믿고 보세요, 예? 차인 사람, 찬 사람, 헌팅 커플, 연상 연하, 첫사랑, 물고기, 어장주인 다 있다고요.”
부지런히 주변인들에게 환승연애 유튜브 클립을 전송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온라인 낯가림도 꽤 있는 편이지만, 30명 넘게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환승연애 톡방에 기꺼이 초대돼 들어가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 경험이 전무했지만 디씨인사이드 ‘환승연애 갤러리’를 실시간으로 눈팅했다. 출연자 유튜브를 찾아보는 건 기본이었다. 출연자가 하는 실제 가게를 찾아가서 친구들이 '너 심하다'라는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나의 ‘덕’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단순히 재미로만 덕이 성립되진 않았다. 지인들에게 환승연애를 추천하면서 한 영업멘트는 나름 진지한 고민 속 나온 말이었다. 그저 순간의 설렘이나 이성적인 끌림만으로 ‘썸’을 전시하는 수많은 연애 리얼리티 속, 연인과 친구, 또는 친구와 가족 그 어느 사이에 있는 커플들의 서사를 리얼리티로 보여준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이 웃기도, 울기도했다. 연인으로서는 곁에 두고 싶지 않지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이미 끝나버린 것을 알지만 익숙함 속 달라진 공기가 어색할 때 그 미묘한 순간들이 다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주 동안은 항상 새로운 에피소드가 업로드됐던 금요일이 허전했다. 덕을 쌓아서 누군가에게 권해야하는데 덕을 쌓을 떡밥이 없어진 게 아닌가. 갤러리 눈팅을 하며 출연자들 뒷소식도 찾아보고 혹시 안 풀린 떡밥이 있지 않을까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그 후. 이제 방영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났다. 아니다 다를까, 덕업상권에 익숙지 않았던 탓인지 나는 또 생각보다 빨리 프로그램에서 헤어나왔다. 이제는 덕업상권의 잔재처럼 보이는 출연자의 유튜브 영상이 내 유튜브 첫 화면에 잔재처럼 떠 있을 뿐이다. 누가 누구와 커플이 되고 안된 게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덕업상권의 맛을 보게해준 환승연애는 2021년 하면 잊을 수 없는 여름의 프로그램으로 떠 오를 것 같다. 다시 한번 이런 몰입감을 가져다줄 환승연애 2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