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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Nov 06. 2021

결핍의 아이러니, 아름다움 / 이루시엔

아름다움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다 읽고 제일 먼저 남은 감정은 비릿한 불쾌함이었다. 십 년 넘게 사랑을 받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잘생긴) 남자가 누가봐도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며 겪는 성장 이야기다. 여자는 소설 내내 자신이 없고 못생긴 자신의 외모를 이기지 못해 데이트 도중 ‘나는 정말 못생겼다’라며 울기까지 한다. 남자도 그렇게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소설은 재밌었고 마음에 남는 문장도 꽤 있었다. 작가가 전하고픈 의도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소설을 아끼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굳이 불쾌함 앞에 ‘비릿한’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재미도 충분히 있고 상념에 잠길 지점도 많이 던져준 사랑 이야기지만 (내가 느끼기에) 작품 곳곳에 묻어난 작가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이 나와는 꽤 달랐기 때문일 테다. 개운하기보다는 비릿하게 소설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새 삼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소설이다. 아름다운 것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우매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하고 사랑해왔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가지자. 그게 아름다운 얼굴이다”라고 했다. 비현실적이라는 작가의 말이 살포시 걸렸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외모적인 기준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사회가 공감하는 아름다움 대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의 사랑 이야기가 그리 비현실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각자의 사랑 기저에는 ‘욕망’이나 ‘결핍’이 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고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다. 자신에게 없는 요소를 채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 정도인 것이다. 


  결핍된 요소를 가진 상대방은 결국에는 그것이 외모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배경적으로나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까.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도 자신에게 충만한 아름다운 외모보다 자신에게는 없는 섬세한 감정선이나 그녀의 취향을 외모를 뛰어넘거나 외모적인 아름다움으로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 이따금 생각해본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상대에게 사랑에 빠진다고 가정한다면, 취향과 적성, 공감, 대화 흐름 속 평소에 갖고 있던 결핍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파고들어 본다.


  쉽게 말해, 피부가 어두운 사람은 피부가 하얀 사람을, 눈이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을, 반대로 눈이 찢어진 사람은 눈이 동그란 사람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예들이 있지 않나. 세상 얌전한 사람이 누구보다 활발한 사람에게 끌리고,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책 읽는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회적인 함의의 아름다움을 넘어 이 모든 건 아름다움으로 크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나는 내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상대방에게서 그들의 결핍을 본다. 숫기가 없어 여자친구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걸 피곤해하면서도 내심 즐기는 커플을 마주하거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직업을 갖고 있는 여자친구를 소개하면서 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친구를 떠올린다. 여자친구와의 대화는 재미가 없지만 그녀의 부지런함이 아름다워 보였다는 친구와 남자친구와 말하는 게 지루하지만 키가 작고 그리 손꼽히게 이쁘지 않았던 자기 대신 남자친구의 큰 키와 훤칠한 외모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털어놓는 친구도 스친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나의 상대방에게서도 내가 가진 결핍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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