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장품을 소개합니다
전 애인들이 모여 함께 지내는 예능이 인기를 끌고있던데, 시류에 편승해 나도 EX-애장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한때 애장품으로 자신있게 꼽았던 물건을 먼지 한 톨의 미련도 없이 분리수거했던 일이다.
2014년에 서점에서 한 책을 구매했다. 산문집 코너를 뒤적이다 호기심가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형광빛이 도는 주황색 표지에 적혀있는 제목보다 작가 이름에 더욱 눈이 갔다. 스무살쯤부터 내 플레이리스트에 잔뜩 우겨넣은 인디 듀오 ‘가을방학’의 작사, 작곡을 맡고 정바비의 산문집이었다. 제목도 어쩜 ‘너의 세계를 스칠 때’ 였다. 당시 1박2일 pd로 유명한 유호진 pd의 연애에 관한 글을 감명깊게 받아들였던터라, 제목마저 ‘삘’이 왔다. 당장 책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달려갔다. (참고로 유호진 pd의 글은 ‘연애를 시작하면 한 여자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로 시작하는 글이다.’세계를 스친다’는 느낌이 비슷했다.)
사온 날 단숨에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또 읽으려고 책장을 앞으로 넘겼다. 포스트잇과 연필도 들어서 마음에 드는 구절마다 붙여놨다. 글에는 재미와 위트가 넘쳐났다. 그 안에 들어있는 통찰력과 세상을 비틀어보는 센스, 읽기편한 문장과 트렌디한 솔직함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한창 언론사 취업 준비를 하며 ‘글빨’과 통찰력이 있는 작가의 글에 환장하던 그 시절, 정바비의 책은 순식간에 작문의 바이블로 마음 속 한 켠에 자리잡았다. 작문 시험이 있는 전날이면 정바비의 책을 두어번 속독하고 시험장에 들어설 정도였다. 제발 정바비처럼 쓰게 해주세요, 하고 주문까지 되뇌였다.
몇 개 기억에 남는 문장을 두어개 소개한다.
- 예전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줄 알았다. 지금은 그냥, 넌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잖니란 푸념을 누군가에게 늘어놓으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다.
- 그 친구가 합리주의와 로맨틱한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10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로맨틱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10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덜 로맨틱한 사람일 거야. 그렇다면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결혼하고 싶어. 이게 나의 합리주의야.” 솔직히 말해서 근래 들었던 말 중 가장 로맨틱한 얘기였다.
아무튼 실제로 정바비st로 작문을 써 필기시험을 통과한 언론사도 꽤 있었다. 그렇게 정바비의 책은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는 애장품이 됐다. ‘지적인 똘끼’를 보충하고 싶을 때마다 내 손을 탄 책이다. 그리고 좋은 게 있으면 일단 친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보는 내 성격 탓에 이 책을 여기저기에 추천하고 다녔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다 빌려주거나 따로 사서 선물했다. 나의 입방정에 이 책을 빌려달라는 지인들도 꽤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취향이 닮은 건지 이 책을 읽은 이들 중 대부분은 호평을 했다.
그러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정바비와 몰카 혐의, 불법촬영 혐의라는 말이 붙어있는 헤드라인이 보였다. 아니길 바라면서 클릭했던 기사 내용 안에는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가 있었다. 아, 빼박이다.
갑자기 그가 쓴 여러 진정성 있어보이던 글과 성(性)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글들 여러개가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해보면 그의 산문집 안에는 남녀의 연애뿐만 아니라 성관계와 관련된 내용도 상당했다. 단지 위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색정광 같은 사람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이라니. 글에서 보여준 진정성있는 모습은 다 부질없던 것인가. 작가의 자아와 성폭력(물론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진 않은 듯 싶지만 경찰이 다수의 불법 촬영 동영상을 확인했다고 한다)을 저지르는 사람의 자아 중 어떤게 그의 참 모습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글에서 어느 울림을 얻었다고 자부하던 나까지 같이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바비를 추켜세웠던 지난날이 민망할 정도였다. 아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직접사서 선물하기도 했었는데, 이게 웬일이람. 독자를 상대로 한 기만행위라고 생각했다. 솔직담백했던 글은 이제 위선자의 글이 돼버렸다.
한달에도 두세번은 꼭 펼쳐봤던 애장품이, 이제는 꼬깃해져 세월의 흔적까지 탄 그 책은 그 날 이후로 말없이 오피스텔 분리수거 통에 들어갔다. 더 화나는 건, 버리기 직전까지 그의 글은 너무나도 재밌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찝찝한 기분으로 내 책장에 둘 수는 없었다. 종이 칸에 그 책을 던져버리는 순간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시원했다. 안녕. 도저히 난 글과 작가를 분리할 수는 없더라고, 잘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