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시작을 위한 이야기
나는 혹은 당신은 아직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가야 함으로써, 살아감에 이름 혹은 제목을 붙여 명명하여 인생을 규정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현재는 그냥 현재로, 일상적인 하루로 두면 그만이다.
태어남의 선택권이 없이 인간의 형태로 세상에 던져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의도보다는 분명 누군가의 의지대로 '삶'이라는 것을 시작하였다. 계획 혹은 목적 따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계획이고 목적이었을 뿐이니, 그저 세상에 던져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당신과 나의 시작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던져졌으니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는 조건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동일하게 주어졌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는 순간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들을 어떻게 흘려보낼 것인가 인데, 나나 당신은 이것을 '삶'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일하게 주어진 시작이었음에도 각자의 방식, 주변환경 등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고, 각자에게 적용되는 변수들은 모두 달라서, 스스로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지금이 되어서도 '삶'이라 불리는 것을 어떠한 이름 혹은 정체성으로 규정을 짓기가 어렵다. 그런 와중에 소위 '학교'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아보니 과거를 살았던,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좋든 싫든 어느 정도 규정이 되더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결국 '삶' 위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되면 누구나 무엇으로든 규정이 될 수 있다고 확인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또한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진 이후의 누군가에 의한 규정이니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나 당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여, 어떠한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아 '삶' 또한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예쁜' 이름으로 규정이 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간의 사후에 대한 가치는 후대의 누군가가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니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용(無用) 한 것일 뿐이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누구와도 무관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다.
'삶'이 40대에 접어들면서 안정감을 위하여 어떤 무엇으로든 규정이 되고 싶다고 말을 했고, 나는 그것을 나의 궁극적인 정체성으로 여기고 싶었다. 수많은 변수들로 인해 번뇌와 논란이 많은 '삶'을 살다 보면 무엇보다도 안전감과 안정감을 필요로 하게 되더라. 그것을 위하여 40대의 나는 무엇이든 되어있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지금은 잠시 잠깐 집을 나간 내가 드디어 돌아오는 그때에 나는 조금은 더 나 같은 모습일 거라고 나의 마음은 이야기한다. 이쯤 되면 내 인생에 '왜?'라는 의문을 던지기보다 이쯤 되니 내 삶에 '그럴 수도 있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현명한 내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의 입에서 뱉어진 생각 그대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아. 나의 온몸에서 뱉어지는 마음 그대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나는 베어 져.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항상 옳은 걸까?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나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혼자일 수밖에 없음이 절실해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나를 맞추게 돼. 그런 순간들이 싫어서 나는 참 슬프게 나를 다독여.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는 내 삶의 이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때문이라고, 내 삶에 절실하지 못한 나 때문이라고 청소를 하며 생각한다. 슬프게 위로를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건 나의 한계점이 여전히도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나를 떠나 나의 온 세계를 여행하는 내가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때의 나는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한 나이기를 나의 온몸과 마음을 다해 바란다. 나는 이제 나를 정의 내리고 싶어 졌다. 자꾸만 변화하는 내가 아닌 무언가로 표현되어지는 내가 되고 싶어 졌다. (2018.09.18)
10대에는 '아직은' 어리다는 이유로 그저 순응하는 삶을 살았고, 20대에는 체력이 받쳐주어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치열하게 살았으며, 30대에는 치유, 여유를 가지고 나를 보듬으며 만족을 배웠고, 40대에는 단순하게 안주(安住) 하기 위하여 무엇으로든 규정되기를 바랐던 내가, 지금에 와서 말할 수 있는 건 10대에는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순응'보다는 실수와 잘못에 대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야 하고, 20대에는 치열하게 살아감으로써 오히려 삶의 동력을 얻어야 하고, 30대에는 긍정적인 변화를 통하여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의도와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안정감을 위하여 무엇으로든 규정되려고 했던 나의 40대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거다. 안전함과 안정감을 위하여 원하던 것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므로 나는 어떠한 하나로 이름 붙여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지금을 살면서 깨우쳐 간다.
내가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는 동안에는 나의 의도 또는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삶'에 대하여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는 말이다. 더하여 존재하지 않는 그 이후의 일들은 위에서도 말했듯 지금의 나와는 전혀 무관할 뿐이다. 시작과 과정이 그러하기에 내 '삶'에 알맞은 제목을 붙이지 못하였다. 간혹 미술관 또는 사진관 같은 갤러리를 들러보면 작품들이 이름 없이 '무제(無題)'인 경우를 많이 확인한다. 이 글을 쓰면서 '무제(無題)'라는 이름으로 걸린 작품들의 의미를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작가들의 고뇌를 생각한다. 작가 자신들에겐 '삶'과도 같은 작품들에 그들 역시도 어떠한 확정적인 하나의 이름을 붙이기가 힘들었으리라. 결국 이러한 나의 번뇌 또한 대중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미정(未定)이 아니라 무제(無題)인 것이다. 나는 조금 또 변화하였다. '게으른 이상주의자'를 표방하던 내가 '행동하는 현실주의자'로 참으로 많이 성장하였다.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라는 책을 읽었다.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몰입하여 스스로에 대한 더하여 인간에 대한 심도 깊은 내면을 너무나도 어려운 말들로 기술을 해 놓은 책이었는데, 어려운 책을 읽고 또 읽어가며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려 애쓰면서도 그것을 재미있어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이런 글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이런 글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 역시 '타인'을 다 알지 못하기에, 대신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기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더 잘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닮은 나만의 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매주 토요일 주 1회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이란 이름으로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한다. 물론 페루난두 페소아만큼의 지식과 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결과물에 대한 완벽한 확신은 없지만 시작을 했으니 글쓰기에 절실해져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