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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시시포스 Jan 29. 2024

도봉산 겨울 산행

다락능선과 포대능선

이른 새벽 집을 나서서 도봉산으로 향한다. 서편 하늘 갖 보름을 지나 몸을 푸는 달이 휘영청 밝은 빛을 머금은 채 도봉산 능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려 한다.


망월사역에서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 심원사 아래 국립공원 북한산 도봉산 들머리에서 벗들과 산행을 시작한다.


며칠간 지속되던 맹추위가 잠시 주춤하지만 이른 아침 공기는 차갑고 상쾌하다. 스마트폰을 바닥에 세워 셀카를 하려던 차에 국립공원 안내센터로 출근한다는 남성이 자청해서 인증 숏을 도와주고 '안전산행'을 당부한다.


산행 코스 안내도 앞에서 서너 개 코스 중 검은색으로 표시된 최고난도인 다락능선 코스로 의견을 모았다. 포대능선까지 긴 능선을 올라 와이 계곡을 지나서 도봉산 최고봉인 자운봉과 나란히 솟은 신선대에 올라 사방 경관을 조망할 것이다. 하산 길은 와이 계곡 좌측으로 우회하여 포대능선 산불감시소를 지나고 망월사를 거쳐 원점 회귀할 요량이다.


포대능선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로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쪽 동편 수락산과 불암산의 긴 능선 위로 부스스 눈을 비비며 떠오른 태양이 사방으로 햇살을 펼친다. 도시는 매연과 시름에 지친 듯 미세먼지의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직 깨어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


공기는 차갑지만 예상과는 달리 바람이 없어 산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곳곳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았고 응달엔 얼어붙은 눈이 얼음길을 만들어 놓았다. 눈과 얼음이 언 길이 나오면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우고 마른땅과 암반을 지날 때는 아이젠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다락능선은 곳곳에 암벽과 평이한 길을 내놓으며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으로 기어오르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중간중간 물개바위, 냉장고바위 등 특이한 모양새의 암석들을 보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도 선사해 준다.


서로 기대어 선 바윗돌 사이로 뚫린 암문은 감탄사를 토해 내게 하는데, 통천문(通天門)이나 통정문(通頂門)으로 불러도 좋을 듯 한 모양새이다.


두꺼비 바위 부근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포대능선 가장자리에 우뚝 치솟아 있는 자운봉이 좌측으로 올려다 보인다.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웅장한 도봉산 암봉들 품속에 안겨 있는 망월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통천문을 지나니 고도가 부쩍 올라가서 망월사가 눈 아래로 굽어 보인다.


앞장서서 길을 잡으며 산행을 리딩하던 오늘의 산행대장 J가 바위 위로 올라서며 앞쪽에 장방형 비석처럼 턱 버티고 서있는 바위를 가리키며 '냉장고바위'라고 한다. 저런 냉장고가 있다면 족히 수 백 리터 들이는 될법하다. 평소 삼일에 한 번씩 도봉산을 찾았다는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코스며 명물 바위 등 도봉산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이 해박하다.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는 보시라도 기다리는지 눈을 산객에게 응시한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미동도 않는다.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능선은 곧추선 암벽을 내놓다가 주춤하며 짧은 내리막길도 내놓는다. 내리막 비탈은 얼어 있어 다리 근육과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산행에서 오를 때보다 더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하산할 때라고 동행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땅이 얼어 있는 겨울, 낙엽이 두터이 쌓인 가을 산행, 땅이 풀린 이른 봄 산행 등 어느 계절이건 내리막길은 조심해야만 한다.


인생의 길에서도 누구든 어느 시점의 길인들 두 번째 가는 길이 있으련만,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앞둔 시기는 산행의 하산길처럼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버릴 것은 버리며 신중을 기해야 할 시기임에 틀림없다. 곧 임박한 퇴직 후의 삶에 대한 모호한 구상처럼 거대 도시 서울 서북변 마을의 짙게 드리운 스모그는 걷힐 줄을 모른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 국토 면적의 약 12%인 수도권에 전체 인구 50% 이상이 집중되고, 전국 기초자치단체의 절반 이상인 118곳이 소멸될 '지방 소멸'의 위험에 처해 있다. "1,685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1955~74 생) 세대가 지방 소재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구조를 지역 균형발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중앙대 마강래 교수의 탁견이 주목할 만하다.


포대능선으로 오르는 막바지 길 부근은 나무계단 데크가 놓여 한결 편안하다. 자운봉, 만장대, 신선대 등 도봉산 주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대능선 전망대에 올라섰다. 사방이 툭 트였고 옅은 바람이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씻어 간다. 북한산, 오봉, 불암산, 수락산, 고령산 등 사방의 여러 산들을 조망하며 불곡산의 악어바위 등 함께 했던 산행의 추억들도 잠시 소환해 본다.


중년의 부친을 따라 산행에 나선 젊은 여성이 암벽에 설치된 철제 난간에 의지해서 수직에 가까운 와이계곡을 힘겹게 내려가고 있다. 예전에 두어 번 오르내린 경험이 있지만 천길 낭떠러지처럼 좁고 깊게 파인 와이계곡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자운봉 쪽 능선으로 올라서는 암벽의 막바지 구간은 특히 오금이 저리게 한다.  


잔뜩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포대능선으로 올라서서 여러 코스로 올라온 산객들과 함께 지척에 있는 신선대 꼭대기로 발길을 재촉했다. 해발 726미터 신선대, 그 정상은 '안개가 잔뜩 드리운 거친 바다 위 해적선 돛대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이럴까' 하는 몽환적 조망을 선사한다.


예전에 비해 산객들이 많지 않아 초면에도 스스럼없이 서로 인증 숏을 찍어 주는 여유로움 넘쳐서 좋다. 와이계곡 암벽에서 고전하던 그 부녀도 어느새 뒤따라 신선대로 올라서서 특별한 산행의 추억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신선대를 뒤로하고 포대능선 쪽으로 길을 잡고 일방통행인 와이계곡의 반대편 좌측 사면으로 빗겨 우회한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 북서쪽 사면엔 잎사귀를 모두 떨군 나목들이 꿋꿋하게 겨울을 나고 있다.


곁가지 능선으로 50여 미터쯤 내려가서 물개 형상을 닮은 바위를 감상하고 포대능선 북쪽 가장자리쯤에 자리한 산불감시소를 지나 망월사 방향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자운봉 등 주봉들이 바라다보이는 햇볕 바른 너럭바위에 자리를 틀고 앉아 배낭을 열고 점심을 들었다. 빵, 떡, 누룽지, 곶감, 영양 음료, 고구마, 포도,... 각자 안방마님의 정성이 담긴 음식들에 헛헛해하던 배가 반색한다.


망월사 못 미쳐서 거대한 바위에 누군가 새겨 놓은 듯 희미한 윤곽의 해골바위를 만난다. 겨울이라서 더 또렷하게 보인다는 동행의 말에  바위의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대 형상에서 해골의 윤곽을 그려 내려 한참 동안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꾸 다니다 보면 길이 되고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게 마련이다.


끊어질 듯 끊이지 않고 나지막한 불경소리가 이어지는 망월사 경내로 내려섰다. 흰 눈을 이고 있는 담장 기왓장과 건물들이 경사진 산중턱에 포근히 안겨 있는 사찰이 물아일체 산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다.


"망월사 無爲堂에는 1885년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한 청국 원세개가 쓴 '望月寺' 현판이 걸려 있다. '광서 신묘년 중추'라는 글귀로 보아 1891년 가을에 쓴 것이리라.


아마 그도 나처럼 이마 위 저 멀리 우뚝 솟은 도봉의 준봉들과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 망월사에서 한창 무르익었을 도봉의 가을 풍광에 감탄하며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붓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_2016 만추 도봉산행기 中


그 이름에서 어렴풋이 '달(月)'과의 연관성을 짐작했었는데 신라 선덕여왕 시기인 639년 해호선사가 창건했다는 이 고찰의 이름에는 '서라벌 월성(月城)을 향해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산행 동무들과 무위당 마루에 함께 걸터앉아 포근히 내려쬐는 햇살을 한동안 음미했다. 사찰 경내는 여전히 스피커에서 낮은 불경 암송이 흘러나올 뿐 스님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망월사의 소담한 산문을 나서 사바세계로 이어진 돌계단 길은 반듯하고 눈도 깨끗이 치워져 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을 2km여 걸어서 망월로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은밀한 다락방에 숨겨둔 보물들을 남몰래 살며시 감상하고 내려온 듯 다락능선을 타고 오른 산행을 마친 후 밀려드는 만족감과 감흥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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