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둘째 날이 밝았다. 오후에 K와 함께 부동산 관계자를 만나고 P영사와 저녁을 들기로 한 날로 오전 시간은 자유롭다. 아침에 느긋하게 만나자고 K와는 미리 얘기해 둔 터라, 혼자서 호텔을 나서 산책 삼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여덟 시경이지만, 20세기 초 근대의 웅장한 대리석 빌딩과 현대식 고층 빌딩이 어우러진 상하이 중심부 황푸구(黄浦区)의 골목들은 인적이 드물다.
허난중로(河南中路)와 지우쟝로(九江路)가 만나는 모퉁이에 자리한 식당에서 샤오롱빠오(小笼包) 2인분을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와서 K와 함께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호텔에서 아침으로 제공하는 빵 우유 계한이 든 종이 봉지가 객실 문 앞에 놓여 있었지만 손이 가질 않는다.
아홉 시경 K와 함께 호텔을 나서서, 아침 산책할 때 눈에 띈 건물 모퉁이의 Manner Coffee 한커우로(汉口路) 점에 들렀다. 나와는 달리 중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K는 커피 생각이 간절했던지, 코로 스며드는 커피 향에 반색을 한다.
지우쟝로(九江路)/호텔 복도의 그림
한커우로(汉口路)의 아침
출근시간 전후라 그런지 앱으로 주문받은 커피를 준비하는 점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젊은 남녀들이 하나둘 점포로 들어와서 미리 주문해 놓은 커피를 찾아서 들고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십오 분여 만에 주문한 라떼 커피가 나왔다.
우리가 아침을 들고 나면 반드시 숭늉을 마셨듯이,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차(茶)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된 민족이었지만, 최근 젊은이들 중심으로 커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71년 시애틀에서 창립한 스타벅스 커피는 1999년 베이징에 첫 번째 매장을 열며 중국으로 진출했다. 2023년 1분기 말 기준 스타벅스의 전 세계 매장 수는 36,170개로 그중 미국의 15,952개에 이어 6,090개 매장을 차지한 중국이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 수의 약 17%를 점했다. 광둥성은 지난 2024년 3월 상하이와 저장성에 이어 중국 본토에서 세 번째로 스타벅스 1000번째 매장이 들어선 지역이 되었다.
이에 대항한 중국 자국 브랜드 커피의 추격과 경쟁 또한 점입가경으로 치열하다. 중국 최대 커피 체인 브랜드는 샤먼에 본사를 둔 루킨커피(瑞幸咖啡; Lukin Coffee)이다. 2022년 9월 말 기준 중국 매장 수 7,846개로 당시 6,000여 개 매장을 가진 스타벅스를 추월하더니, 2024년 7월에는 매장 수가 2만 개를 돌파하며 스타벅스를 멀찍이 따돌렸다.
루킨커피 원두는 IIAC(In'tl Institute of Coffee Tasters) 주관 시음 대회에서 2년 연속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인의 기호와 품질을 검증받기도 했다.
2015년 상해시 징안구에서 설립된 Manner coffee는 2024년 6월 기준 총 매장 수가 1,295개라고 하니, 아직까지는 루킨이나 스타벅스에는 필적할 수 없어 보인다.
중국 자국 브랜드 커피의 경쟁력은 고품질, 외래 커피의 절반쯤 가격의 가성비, 모바일과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편의성 등에 있다. 상하이에 근무할 때, 점심을 든 후 스마트 폰으로 가까운 매장과 메뉴를 골라서 판촉 할인가로 루킨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하는 것은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온갖 종류의 차(茶)가 주름잡던 중국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 커피, 그 광활한 시장을 두고 거대 브랜드들이 일전을 불사하며 점입가경 치열히 경쟁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매장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난징동루 역에서 교통대학 역으로 이동했다. 현령목 가로수가 늘어선 우캉로(武康路)를 따라 옛 조계지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자리한 지역으로 상하이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 볼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우캉로(武康路)
교통대학역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 여섯 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의 우캉로(武康路)와 화이하이중로(淮海中路) 사이에 랜드마크와도 같은 우캉대루(武康大楼)가 옛 모습 그대로 서서 반긴다. 노르망디 아파트로 알려진 이 빌딩은 상하이 최초의 복도식 8층 아파트인 이 건물은 외국인 임대용 주택으로 1924년에 건립되었다.
우캉루 주변 골목골목에는 중국의 국부 손문의 부인이자 국모로 칭송받고 있는 송칭링(宋庆龄, 1893-1981)을 비롯해서, 바진(巴金, 1904-2005), 커링(柯灵, 1909-2000), 장러핑(张乐平, 1910-1992) 등 숱한 명사들이 거주하던 19세기 초에 건축된 기념비적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중간중간에 음료점, 잡화점, 서점, 꽃집 등이 자리하여 볼거리와 잠시 걸음을 쉬어 가는 휴식처를 제공한다.
건물 현관 벽면 전체에 진녹색 바탕에 '376 武康路'라는 큼지막한 지번을 새긴 명패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 앞에서 시간의 강을 뛰어넘어 예전 모습대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겼다.
화가 자이용(翟勇)의 작품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길에서 깊숙한 마당을 끼고 3층짜리 고급 맨션이 눈길을 끈다. 입구의 안내문이 '서행기(西行紀)'라는 제하에 자이용(翟勇; 1965-) 화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장쑤성 쩐장 출신으로 상하이사범대학 미술학원 교수이기도 한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았다. 건물 1~2층 벽면에 전시된 30여 점의 작품들은 전시회의 제목처럼 신장 지역의 인물상과 풍경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란, 프랑스, 미국 등의 영사관이 자리한 우루무치로(乌鲁木齐路) 부근 작은 녹지에서 니에얼(聂耳, 1912-1935)의 동상이 맞이한다. 윈난성(云南省) 위시(玉溪)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 중국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의용군행진곡(义勇军进行曲)'의 작곡자이다. 잠시 힘찬 곡조에 비장한 가사의 '의용군행진곡'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니에얼 동상을 지나고 11시경 지하철 10호선 도서관역에서 네 정거장 떨어진 위위엔 역에서 내렸다. 위위엔(豫园; 예원)은 명나라 관료였던 반윤단(潘允端, 1526-1601)이 부모를 위해 1559년에 착공해서 18년에 걸쳐 조성한 전형적인 강남지역 개인 원림(园林)이다. 중국 역대 정원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칭송받는 이 정원은 한동안 피폐해졌던 것을 청나라 때 복구하는 등 부침을 거쳤다고 한다.
처음으로 위위엔을 찾았던 것이 어제의 일인 듯한데, 이십 년이 훌쩍 흘렀다. 월요일이라 위위엔 내부는 둘러볼 수 없지만, 그 주위 연못 위 놓인 구곡교, 화려하고 웅장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로 조성된 상가 등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겹칠 듯 머리 위를 덮은 층층 높은 기와지붕 아래 금은 세공품과 장신구, 분첩 등 전통적인 화장품, 탕후루 호떡 등 군것질거리, 전통 의복 등 온갖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선 좁은 골목을 거니는 독특한 흥취는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원 상가 입구
상하이 성황묘
예원 상가 남쪽 끝에 자리한 성황묘(城隍庙)로 가서 입장료 10위안을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서한(西汉)의 대장군 곽광(-BC68)을 봉헌하던 사원으로 명나라 영락 연간(1403-1424)에 건립된 상하이 성황묘는 현재 진유백(秦裕伯, 1296-1373)을 봉안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전(大殿), 원진전(元辰殿), 부모전(父母殿), 관성전(关圣殿), 문창전(文昌殿) 등 9개 주요 전당이 자리한다. 전각들마다 복을 빌며 향을 피우거나 연신 허리를 굽히는 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성황묘를 빠져나왔다.
위위엔 상가 식당가에서 뷔페식 네댓 종류의 음식을 골라서 점심을 들었다. 어떤 음식은 입에 맞았고 어떤 음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와이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 시경 와이탄 소호( 外滩SOBO) 빌딩 지하 루킨커피점에서 라테 한 잔씩을 들었다. 입속에 남아 있던 중국음식 특유의 강한 향이 조금 중화되는 느낌이다.
와이탄을 거쳐 호텔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하고, 오후 일정을 위해 전철로 구베이(古北)로 이동했다. 주재관 시절 거주했던 구베이는 양 옆으로 온갖 상점이 들어선 약 1km여에 달하는 널찍한 보행가인 '황금성도(黄金城道)' 주변에 고층 아파트 군이 밀집한 지역으로 외국인들도 많이 거주한다. 강남의 가을은 아직 다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황금빛 나뭇잎으로 치장한 황금성도의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휴대폰에 추억을 담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 종사하는 C 선생과의 미팅을 가졌다. 한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게 치솟던 중국의 부동산 경기는 최근 몇 년 동안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녁에는 옛 동료였던 영사관의 P 영사와 저녁을 함께 들었다. 구베이 부근 '콩이지(孔乙己)' 식당에서 황주(黃酒)와 바이주(白酒)를 반주 삼아 중국 강남 전통의 맛과 추억을 반추하는 흥취가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