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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Feb 25. 2021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우리가 지금 정말 슬퍼하고 있는 일은
우리의 생활양식 전체의 갑작스러운 종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 상실을
애도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독일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감염병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바이러스에 대해 경고했고, 17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정치가들은 과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그토록 꾸짖었건만. 아무 대비 없이 우리 자신을 이런 파국으로 밀어 넣은 우리의 시스템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여전히 인간은 이 바이러스의 습격을 하나의 재수 없는 사건으로 여기거나 곧 깨어날 악몽으로 치부한다. “이 사태는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온 인류에게 내린 잔혹하지만 정당한 처벌이다.” 따위의 숨겨진 메시지를 찾고, 감염병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을 우주의 소통 파트너로 간주하며 일종의 위안거리를 찾는다.


바이러스는 일반적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산 주검living dead이다. 바이러스는 복제하려는
충동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살아 있지만, 일종의
바닥상태 생명이다. 죽음충동의 생물학적
구현체라기보다는 가장 미천한 수준의 반복과
증식을 일삼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구현체다.
그렇지만 바이러스는 거기서 좀 더 복잡한
생명체가 진화하는 기초적 생명의 형태가 아니다.
바이러스는 순전히 기생적이며, 더 발달한
유기체들을 감염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복제한다.
-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건 이 감염병이 자연의 우연성으로 그냥 생겨났을 뿐 아무 숨겨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또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적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그저 맹목적인 자동기계처럼 자기재생산을 할 뿐이다.


바이러스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활동하지만 생명이 없는 화학적 단위에 불과하다. 바이러스는 계획과 전략을 갖추고 우리를 무찌르려는 적이 아니라, 끝없이 자가증식하는 한갓 메커니즘일 뿐이다.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고, 죽지도 않고, 무한반복 재생되는 바이러스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면서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의 생존에 위협을 가한다.


그래서 이 바이러스성 감염병은 우리에게 삶의 궁극적 우연성과 무의미성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생태학의 가르침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인류가 부지불식간 자연의 종말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 말이다. 이 생명과 죽음 사이를 진동하는 한갓 바이러스 같은 자연의 우연성에 의해 모조리 끝장날 수 있다는 것과 거대한 대자연의 질서 한가운데 인간은 그저 한갓 종에 불과하다는 가르침도.


오늘날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사업에서
자기착취auto-exploiting하고 있는 노동자다.
사람은 이제 주인과 노예가 한 몸에 들어 있는
존재다. 계급투쟁조차 자기 자신에 대항하는
내적 투쟁으로 변해버렸다.
- 한병철, <피로사회>


집에만 머물며, 컴퓨터를 이용해 일을 하고, 화상회의를 통해 소통하고, 재택 사무실 한 편의 기구 위에서 운동하고, 배달 음식을 먹으며, 다른 인간 존재들은 결코 직접 만나지 않는 현실은 바로 정확히 우리가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적 미래다. 그나마 지식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은 이메일과 통신수단을 통해 협력할 수 있기에 그렇게 격리된 채 ‘자기착취’를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장과 노동 현장, 가게, 병원, 대중교통 수단처럼 집 바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적 격리 상태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안전하지 않은 외부에서 사투를 벌인다. 계속 늘어나는 환자들을 돌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지켜주기 위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은 현대 자본주의 첨단에 서 있는 ‘새로운 노동계급’이다. 우리는 바이러스 감염병을 통해 설사 공장문은 닫아도 돌봄 노동자 계급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과도하게 착취당하고 있다. 그리고 난감한 선택의 기로에 처해 있다.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스스로가 감염되도록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실업 상태를 택할 것이냐.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봉쇄 조치가 완화되어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어떤 자유?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거나 생계수단을 잃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 굶어 죽거나 목숨을 무릅쓰거나?


이 바이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완전한 파괴와 같은 종말을 뜻하지 않으며,
지금껏 감춰진 어떤 진리가 드러남을 뜻하는
본래 의미의 묵시적 파국과도 같지 않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뿐이다.
-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이 바이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완전한 파괴나 묵시적 파국 같은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마치 이 정점이 지나면 점차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처럼 감염병의 최고점을 애타게 주시하지만, 이 위기는 그저 계속 이어질 뿐이다.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감염병과 환경 교란이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바이러스 백신을 맞아도 또 다른 유행병이나 생태적 재난의 위협 아래 계속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유행성 감염병이 여름의 더위를 만나면 증발해 버릴 것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출구 전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일상의 기본 좌표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상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늘 위협이 도사리는 훨씬 취약한 바이러스의 세계에서 ‘새로운 일상new normal’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통스럽게 재구축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진행형인
바이러스 감염병으로부터 깨우칠 수 있는 가장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자연이 바이러스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메시지를 돌려주는 일이란 사실이다.
그 메시지는 이렇다. 네가 나에게 했던 짓을
내가 지금 너에게 하고 있다.
-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다가오는 생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근본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지구 상의 여러 종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에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실존을 대하는 태도 전부를 바꿔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이 우리 삶의 기본적 지향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철학 혁명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바이러스 시대 국가의 공적 기능은 더욱 커졌다. 단지 격리하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경제 원리를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비용에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전기, 수도, 식량, 의약품 같은 기초 공공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고 있는 사회는 모두가 보건의료와 기본 욕구를 충족할 충분한 음식을 제공받으며,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 훨씬 온건한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식시장과 이윤이라는 좌표들 바깥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야말로 필요한 자원들을 생산하고 조달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건 없는 전면적 연대와 전 지구적으로 조율된 대응이 필요하며,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노력을 다잡지 못한다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도시는 인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치명적인 위협을 통해 성찰하고 자기 파괴를 멈춤으로써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수 있다. 지젝은 우리의 생명과 생존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와 전 지구적 협력으로 탄생할 초국가적 지구정치의 사회 모델을 제안한다. 지젝 말대로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정치적 혁명을 마련해줄지, 새로운 야만의 시대를 마련해줄지 정말로 우리 손에 달렸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처럼 “과거 우리는 다른 배를 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모두 같은 배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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