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의 불륜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나는 것
내가 항공사 예약부에서 일하던 때였다. 예약부는 주로 티켓 예약과 발권을 하거나, 예약 확인, 환불 등등 예약에 관한 전반적인 일을 하는 부서이다. 입사하고 채 한 달이 안 되었을 때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그야말로 생초짜였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안녕하세요. xx항공사입니다."
"제가 남편과 홍콩을 가는데 예약이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요"
"그럼 손님 성함 알려주시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남편 이름으로 확인해 주세요. 이름은 이태오입니다."
"네 손님, 이태오 님 이름으로 오늘 1시 출발 홍콩행 비행 편 잘 예약되어 있습니다"
"제 이름도 잘 들어가 있나요? 혹시 이름이 잘 못 들어가 있을까 싶어서요. "
"네 여다경 손님과 예약 잘 되어 있고, 자리도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다른 문의전화와 다르지 않은 일반적인 통화였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xx항공사입니다."
"야~ 내 예약사항 알려준 년 누구야!!!!!!!"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내가 뭐라고 얘기할 새도 없이
그 여자는 악을 쓰며 욕을 했다. 당장 항공사 사무실에 와서 다 불 질러 버리겠다는 것이다.
"손님 진정하시고, 손님 성함 알려주시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떤 년이냐고!!! 여다경 이름 확인해준 게!!!"
여다경...
방금 전 내가 예약 확인을 해준 그 여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 되었고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어폰을 끼고 통화를 하니 내 귀에만 쩌렁쩌렁 그 여자의 욕이 들리는 것이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내 자리만 활활 타오르고 있다.
상황을 정리해보니, 여다경과 이태오는 불륜관계였는데 남편의 불륜을 의심한 아내가
항공사로 전화를 해서 남편 예약을 확인한 것이다. 나는 좀 전에 이태오의 아내에게
남편과 불륜녀의 홍콩 여행을 확인해 준 것이다.
전화로 확인을 한 아내는 곧장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에 잠복해 있다가
여다경의 머리채를 낚으려는 찰나 여다경은 네발로 뛰어 도망쳤다고 한다.
( 공항 카운터에서 일어난 일은 그 후에도 심심풀이 땅콩만큼이나 우리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대화 아이템이 되었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은 사실 현실에 비하면 세발의 피라고 하더니 진짜였다.
당시에는 운도 지지리도 없이 왜 하필 내가 그런 전화를 받았을까.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졌네.
나 같으면 불륜을 확인한 순간 당장 이혼이다 이혼!
뭣하러 공항까지 가서 그런 개망신을 당할까 싶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 아내 생각이 난다.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남편과 함께 살고 있을까?
공항까지 가서 남편의 불륜을 확인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감히, 지금은 당장 이혼이다 이혼!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이혼을 하려면 경제적 독립이 먼저 되어야 할 것이고,
아이가 있다면 아빠 없이 자라야 할 아이 인생까지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이혼녀라는 딱지를 달고 갖가지 색안경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리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8살 무렵부터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여자를 만났다.
나는 아빠가 그 여자를 만나러 매일 밤마다 나가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은 아빠가 나가자 엄마는 나와 함께 아빠 뒤를 몰래 밟아 그 여자의 집을 알아내기도 했다.
엄마는 다 알고 있었지만, 이혼하지 않았다.
나는 뻔뻔한 아빠도 싫었지만 엄마도 싫었다.
바람피우는 남자와 사는 것도, 불륜녀의 집에 들어가 그 년 머리채도 못 잡는 것도,
그리고 이혼해서 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엄마가 싫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내가 그때 엄마 나이가 되었다.
당시에 엄마는 다 자란 어른처럼 보였는데 막상 내가 그 나이가 되니 아직 너무 어린 나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밤마다 나가는 아빠의 문소리에 서늘해졌을 엄마 마음이,
그리고 그 밤 어린 딸과 남편 뒤를 밟아 불륜녀 집에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봤을,
어린 세 남매를 키우는 어린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소리없이 울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는 불안한 눈빛의 8살인 내가 보인다.
어쩌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소나기를 맞고만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처마 밑에 들어가 소나기가 그치기 만을 기다릴것이고
또 누군가는 우산을 쓰고 소나기를 헤처 나갈 것이다.
소나기가 얼마나 세차게 내릴지는 모르지만 분명한건 나는 소나기를 맞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번 돈으로 튼튼한 우산을 사서 씩씩하게 소나기를 헤처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내 딸이 소나기를 헤처 나가는 나를 내 등 뒤에서가 아니라 앞에서 봐줬으면 좋겠다.
소나기 맞은 내 등만 보느라 소나기가 그친 뒤 뜨는 무지개를 못 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