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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Oct 20. 2020

S# 14 서귀진성에 들어선 일제 주재소

옛 서귀읍 사무소 전경(1969년)/아래는 현재



현재 서귀 자치경찰대/ 과거 읍사무소 자리



막스 베버의 Max Weber는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은 시장과 관료제라 했다. 시장은 자원의 최적 배분 기구이며 관료제는 국가 또는 도시의 최적의 운영 기구로 평가했다. 일제는 이 이론을 식민지 조선은 물론 제주, 서귀포에도 적용한다. 토지조사를 통해 식민지 제주의 경제적 물적 토대인 토지와 집들의 소유관계를 파악한 일제는 그다음 단계로 근대적 행적 기구를 도입한다. 식민통치가 사회구성원 최소단위에까지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느슨했던 사회를 단단히 조직화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행정조직의 궁극적 목적은 제주를 제국주의 체제 구축을 위한 제2의 일본으로 편입하고 동시에 제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중심에는 행정력, 사법권 등 물리적 공권력을 독점한 일본인 관료가 중심에 섰다. 기존 마을 단위의 전통사회의 자치 조직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토지조사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인 사유재산제를 확고히 하는 한편 일제의 토지 점유 합법화를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등 제주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조세를 통한 재정 수입 확대는 덤으로 주어졌다.

조선의 권력으로 상징되는 서귀진성이 1차 표적이 되었다.  앞서 S# 7 서귀진성은 언제 사라졌나? (https://blog.naver.com/martis1/222088044505) 포스팅을 통해 살펴본 대로 서귀진성은 1901년에서 1906년 사이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성을 허문 자리에 가장 먼저 치안과 위생을 담당하는 일본 순사 주재소를 둔다. 이후 제주도 지청, 법원 지청(등기소), 초등교육기관, 우편소 등이 차례로 들어선다.   



포구 인근 해안가에는 일본인을 위한 주택가가 조성되었고 집과 여관, 일본인 정주 상점 차례로 들어섰다. 이전까지 오일장과 보부상을 통한 초보적 시장경제에 익숙했던 서귀포 사람들에게 정주 상점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동양 척식회사의 말단인 금융조합을 통한 신용팽창, 통화량 확대, 경기부양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기엔 당시 제주와 서귀포 사회는 그동안 너무나 닫혀있었고 또한 무기력했다.


1899년 이전 군산,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은 이미 개항한 상태였다. 제주도에서 산지(제주항), 한림, 조천, 성산, 김령 그리고 서귀포는 거점 항구로 선택되었다. 1920년까지 가로망 정비 계획과 시가지 건축 취체 규칙에 의거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일주 도로가 건설되었다. 1922년 일본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서귀포를 비롯한 거점 항구에는 사람과 돈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공장과 군수기지를 위한 수력발전시설(1941년)이 들어섰고 공동수도와 의료기관 등 공공위생 시설도 차례로 설치된다. 1934년 일본 총독부는 조선 시가지 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領을 공포했고 제주에는 1937년 제주도 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첫 단계는 행정구역 재편이다. 구한말 제주군, 정의군, 대정군이었던 관제는 일제 강점 이후(1913년 12월 29일) 제주군으로 통합된다. 완도군 추자도, 보길면 횡간도도  이 시기에 제주군으로 편입된다. 1914년 4월 13개 개面이 제주군 아래 행정구역으로 신설된다. 새로운 이름으로 구성된 면과 구역은 아래와 같다.


제주군(명칭)            (구역)


제주면                중면(원제주군)일원       

구좌면                구좌면 일원

신좌면                신좌면 일원

구우면                구우면 일원

신우면                신우면 일원

정의면                좌면(원정의군)일원

동중면                동중면 일원

서중면                서중면 일원

우면                    우면(원정의군)일원

대정면                우면(원대정군)일원

중면                    중면(원대정군)일원

좌면                    좌면(원대정군)일원

추자면                추자면 일원


서귀포는 우면에 속했다. 행정구역 명칭 시행 공고는 1914년 4월 7일 관보에 실렸다. 지난 S# 13 포스팅에서 소개한 토지조사에서 전라남도 제주군 우면 서귀리라는 명칭 사용된다.  1933년 제주도 제주군은 제주도 제주읍으로 변경된다. 1935년 3월 15일 전라남도령 제7호에 따라 관내 명칭이 새롭게 바뀐다. 과거 명칭에서 소재지 부락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지었다. 


1911년(좌) 1914년(우) 행정구역 



개정 명칭                    옛 명칭 

애월면(涯月面)         신우면(新右面) 

남원면(南元面)         서중면(酉中面)

한림면(翰林面)          구우면(舊右面) 

표선면(表善面)          동중면(東中面)

안덕면(安德面)          중면(中 面) 

성산면(城山面)          정의면(旌義面)

중문면(中文面)          좌면(左 面) 

조천면(朝天面)          신좌면(新左面)

서귀면(西歸面)          우면(右 面)


1914년 행정구역 명칭 변경 관보



1916년 우면 서귀리에는 도지청島支廳을 설치된다. 지청이 설치된 곳은 바로 서귀진성 터인 서귀동 713번지 일대다.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도지청이 서귀포의 첫 관공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부만근의 『제주지방행정사』(2007년)는 1911년에 월명·김녕·대정·정의·서귀포 등 5개의 순사 주재소의 명칭과 위치를 설정했다고 기술한다. (총독부 고시 제331호) 경찰 주재소의 관할구역과 명칭을 정했다는 의미를 실제 설치되었다고 판단하기엔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 1908년 일본인 키요미즈 시게미츠淸水重滿가 첫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전라남도 광주경찰서 소속 제주 분파소에서 제주 경찰서로 승격된다. 1915년 5월 군제가 폐지되고 도사제가 실시되면서 도사가 경찰서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5명의 일본인 경찰이 서장으로 부임했다. 1911년 카츠라기사이지로葛城最太郞가 서장으로 부임하며 서귀포를 비롯 월명(구우면), 김녕(구좌면), 대정(대정군), 정의(정의군) 등 5개의 순사 주재소가 지정되었다.

일제 경찰은 본연의 기능인 치안 외에도 행정과 사법 등 통치 말단에서 식민지 주민의 일상을 통제하는 기능과 권한을 부여받았다. 행정과 사법 업무 외에도 언론의 지도, 사회 풍속 개선, 납세 독촉 및 국경 세관, 밀수입 단속, 학교 시찰과 일본어 보급, 중국인 노동자 단속, 종두 보급과 전염병 예방 등 사회 전 부문에 간여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에는 2배 이상의 경찰이 사찰과 치안 분야에 투입되어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감시, 탄압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도시계획은 일제 관료에 의해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며 강압적인 고통을 수반했다. 조선인과 조선 국토는 철저하게 타자 the other였으며 정복과 교화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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