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진 고래공장
서귀포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부두 동산에는 일본식 목조건물 한 채가 있었다. 정원에는 고래 뼈 아치가 세워져 행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누여겨 봤다...(중략)... 일본 아이들은 이 문이 행운의 문이라며 자주 들락거렸다. 일본 사람들은 액운을 막아준다는 발상에서 세웠다는 풍문이 돌았다. 우리에게는 끔찍한 혐오시설이라 야밤에는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선인들의 삶의 향취』 2019년 윤세민
일제강점기에 서귀 보통 공립학교 고등과를 재학한 후 서귀포 초등학교 교장 등 교직에 종사하다 은퇴한 윤세민(90) 선생의 회고록이다. 그는 일본인이었던 사이고다케치카 西鄕武什가 고래뼈 아치를 세운 집 주인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이고다케치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서귀포에서 말년을 보냈다. 사이고는 서귀포 심상소학교(일본인 학교)의 설립 이사장을 맡은 등 서귀포에 이주한 일본인 중에도 원로급에 속했다. 일본 아이들의 학부모들에 의하면 사이고는 러일 전쟁에 참가한 일선 부대장으로 공을 세웠으며 지금도 그때 차고 나갔던 일본도를 다다미 방 상단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윤세민 선생의 회고처럼 서귀포 원로들은 대부분 거대한 고래뼈 아치를 기억한다. 일제 신사神社 앞 붉은 도리이鳥居처럼 괴기스러운 고래뼈 아치는 서귀포의 또 다른 암울했던 역사를 증언한다.
제주에서는 애초부터 고래잡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작은 배를 이용한 어로나 잠녀들의 해산물 채취가 수산업의 전부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포경업을 독점했고 서귀포에도 고래잡이를 전문으로 하는 포경회사가 들어온다. 1926년 서귀포항 동편과 새섬을 연결하는 방파제가 완성된 후였다. 1936년 6월 9일 고래잡이를 위한 잔교棧橋가 가설되었고 이 다리로 석탄과 해체된 고래를 하역했다. 잡힌 고래는 가공을 통해 전량 일본 오사카 등으로 반출되었으며 정작 서귀포 사람은 고래 고기를 맛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1931년 서귀포를 여행한 일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는 당시 서귀포항 포경선 입항 풍경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저녁 무렵 서귀포에 도착, 나가타長田 여관에 자리를 잡고 남도의 달 밝은 밤을 잠시 산보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포경선이 입항하였다고 여관 종업원이 깨우는 바람에 주인의 안내로 구경나갔다. 작은 산과 같은 괴물 두 마리가 바다로부터 올려져 장도長刀를 손에 든 어부들에게 둘러싸여 고래기름을 태우는 화롯불에 비추이면서 순식간에 등이 쪼개지고 배가 갈라지면서 암적색의 피를 엄청 뿜어대는 광경은 용맹스러운 광경이기는 하지만 미적지근한 생피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은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 「제주도의 민속」 1931 아키바 다카시 秋葉 隆
일본인 토목기사 가자야마 아사지로는 1928년 발표한 <제주도 기행>을 통해 당시 서귀포의 모습을 글로 옮겼다. 1928년 서귀포는 이미 대정과 정의를 넘어서 제주도 제2도시로 발돋음하고 있었다.
숙소 앞 길을 건너서 밭을 하나 지나니 그 바로 아래가 서귀포항이었다. 마을은 도로와 해안을 따라 점재 되어있다. 항구 앞에 새섬이 있고 이것이 항구 앞면의 방파제가 되는지 서쪽부터 항구와 이 섬을 돌담으로 연결하고 있다. (중략) 해안에는 요시노吉野라는 요리점에서 동북쪽으로 꺾어 부락으로 들어섰다. 동박새가 많은지 어느 집에서든 한두 마리 기르고 있어 소리 높여 계속 지져댄다. 금융조합, 우편국, 등이 있는 조그마한 상가가 늘어져 있어 제법 마을 모습을 하고 있다. 법원 지청, 경찰관 주재소가 잇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인구가 1,000명 이상은 될 것 같다. 서귀포는 제주도에서 제주성내 다음으로 큰 마을로 근해 어업의 전진기지가 되고 있다.
-『제주도 기행』 가지야마 아사지로
장쾌무비(壯快無比)한 고래잡이
벌서 사십두포획(四十頭捕獲) 제(濟) 포경업(捕鯨業)에 쾌보(快報)
【濟州】끗업시 넓은 바다! 태산가치 일어나는 험한 물결에 불과 얼마아니 되는 배에 몸을 실코 멀리 남쪽지나바다(南支那海)를 돌고 돌며 해중왕(海中王) 고래의 무리(鯨船)을 견우는 포경선(捕鯨船)의 활동은상상만 해도 통쾌한 일이다 반도의 남쪽 제주도(濟州島)에서도 가장 남쪽인 서귀포(西歸浦)는 도내에서 한림항(翰林港)에 필적할만한 어항(漁港)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가 이곳에 가진 설비를 하고 포경어업에 착수하기는 수년전일이다 어긔(漁期)는 대개 구(九)월부터 십이(十二)월가지 사(四)개월 동안이나 지금까지 통게를 보면 일년에 최고 삼십두가량이엿다고 한다 그런데 금년은 의외에 지난 십(十)월까지 불과 이개월동안에 근사십두를 잡아 연일 부두에 포경선의 우렁찬 긔적이 끗칠새업고 씩々한 어부들의만면회색의 활긔(活氣)를 볼수잇서 약진도정(躍進途程)에 잇는 제주도수산게(濟州島水産界)에 일대쾌보를 주엇스며 이것을 시가로 환산하면 최고 일만원까지 잇스나 평균 오천원(五千圓)으로 보아 이십만(二十萬)원의 거액에 달하는바 압흐로 얼마나 잡힐른지가 또한 볼만한 일이라고 한다
- 매일신보 1937. 11
1937년 한 달 동안 무려 40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는 기사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바다에서만 한 해 평균 약 100마리의 고래가 포획되었다. 1927년에는 70여 마리만 잡혀 '불어년不漁年' 이라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서귀포에서 한 달간 잡힌 40여 마리의 고래가 얼마나 많은 수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한 마리 평균 5천 엔이면 현재 가치로 시세로 약 7천만 원이다. 고래 어획고가 총 20만 엔 이면 약 28억 원으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포경은 일본 포경회사의 독점 사업이었고 조선인은 단순노동 등 잡일에 종사했다. 뿐만아니라 고래 해체가 있는 날이면 해체된 고래 피로 바다가 벌겋게 물들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당시 서귀포 해녀들은 말한다.
거기 고래 잡을 때는 우리 앞 개도 물질 못했수다. 피로 그자 막 대안으로 너던이 되어부런, 고래 푸기만 해도. 고래 잡앙 올령. 죽을 만해도 고래피가 경 나신고라. 다른 디 강 피운산 못하게. 서귀포 어부들이 해수게. 고기 다 돌아나분덴 막...
- 2012 김소정 양정필 구술 채록 「제주해양문화콘텐츠」에서 인용
고래 포경업은 일본인만 배불리는 사업이었고 조선인은 오히려 어업에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다. 윤세민은 일본인 급우가 도시락으로 싸온 고래 고기를 맛본 경험이 있었으며 고래 고기는 일본인들만의 일종의 특권이었다고 증언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의 고래 남획으로 제주 앞바다에선 고래의 씨가 말랐다.
해상 괴담
제주도 앞바다에 배의 망령이 나타나다. 갑자기 충돌과 순식간에 사라지다
조난 포경선 도처환(稲妻丸)
지난 10월 5일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 70해리 서남 지점에서 행방불명된 포경선 도처환은 내지인 9명, 조선인 3명, 중국인 요리사 1명 합계 13명을 태운 채 오늘에 이르러서도 발견되지 않고 팔방으로 수색 중이지만 당시 행동을 함께 하던 소화환, 천조환 두 배의 승무원으로부터 상황을 듣고 당시 소화환은 8마리의 포경을 하고 또 천조환은 10마리를 잡고 도처환은 단지 5마리를 포경했을 뿐 당일에도 천조환은 1마리를 포획하고 서귀포에 귀항하고 있을 때 도처환은 그것을 보고 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유감이라며 폭풍을 헤치며 다시 바다로 나가 마침내 행방불명되었다. 그후 조난 장소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자매선의 천조환이 항행하자 흰 파도가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행방불명의 도처환이 나타나 갑자기 충돌이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선체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것이 게다가 소화환도 똑같이 그 장소에서 마주쳐서 어쩐지 기분이 섬뜩하고, 소화환는 10월 25일로 대흑산도에 인양되고 천조환은 시모노세키(下關)에 선체 수리로 각각 인양되므로 제주 서귀포는 예년의 포경 성황은 황폐하여 기생들도 큰 타격을 당했다. 이렇게 해서는 서귀포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하여 주민들은 12월 15일 도처환의 조난자 추도회를 겸해 포경 법회를 한다. 제주도에서는 이 도처환의 이야기로 자자하다고 목포 경찰서의 심석(心石)고등 주임의 이야기이다.
- 1933년 12월 09일 부산일보
일확천금을 향한 고래잡이 경쟁은 결국 비극적 사고를 낳았다. 1933년 11월 동양 포경 주식회사의 포경선인 이나즈마마루稻妻丸가 무리한 조업을 강행하다 해난사고를 당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 배는 선원 13명을 태우고 서귀포를 떠나 서 동지나 서남방 약 75해리 부근에서 실종되었는데 3일 후 전남 경찰부가 이 사실을 알고 각지에 수배했으나 경찰은 하루 전에 실종된 것으로” 보도했다. 이 조난 사고로 고래 공장 근처에 이들 실종자 13인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해방을 전후해 비석을 주민들에 의해 절반으로 파손되었다. 고래 공장 터 인근 수풀 더미 안에 버려진 추모비가 고래 공장을 기억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일본인이 떠난 후 버려진 채로 남아있던 건물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파손되어 철거되었다. 사진에서 확인된 것만 다섯 동의 작업장과 인부 막사, 사무실 등이 보인다. 잔교棧橋도 선명하다. 새섬과 연결된 방파제가 보이며 섬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데 이곳에서 한때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고래공장 터는 현재 새섬 입구 관광잠수함 주차장으로 사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