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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Nov 03. 2020

S# 17 그 많던 감저는 누가 다 먹었나?

감귤은 제주를 상징한다. 한라산, 바다, 올레 등 제주하면 연상되는 상징이 있지만 감귤에 못 미친다. 감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제주를 대표하는 독보적 농산물이다. 한라산 남쪽에 위치한 서귀포는 제주시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하다. 감귤이 자라기 더 좋은 환경이다. 최근 10년간 통계를 보면 감귤 생산량은 약 50~60만 톤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마늘과 양파, 당근, 배추, 무 등 채소류의 재배면적은 늘었지만 생산량은 감소하는 추세다. 벼, 보리, 봄 감자, 콩 등 주식에 관련되는 작물의 재배면적과 생산량의 감소 폭은 더 크다. 봄 감자의 경우 2017년 13,000톤으로 전국 생산량의 3.3%를 차지하지만 역시 감소 추세다. 사실 오늘 할 이야기는 감귤이나 감자도 아니라 감저甘藷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제주에서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감자는 '지슬地實', 고구마를 '감저'라 한다. 기록으로 보면 '고구마'보다는 '감저'가 원조에 가깝다. 조선 초 『본초강목』에도 고구마는 '감저'로 표기되어 있고 18세기 후반 고구마가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에도 고구마는 감저였다. 이 감저보를 통해 고구마 재배법이 조선에 널리 보급된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1925년)에서 '감자'도 고구마를 의미하는 말이다. 고구마라는 명칭은 '감저' 종자를 대마도에서 들여올 때 일본 말 '고코이모孝行芋, こうこいも'를 음차 했다는 설이 있다.(출처 : 위키백과) 즉 '고구마'보다는 '감저'가 원조에 가깝고 제주도에서 쓰는 '감저'는 방언이라기보다 원 명칭이 살아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산지가 중앙아메리카로 콜럼버스에 의해 스페인으로 들어온 후 중국을 거쳐 일본과 한반도 등으로 전파되었다. 한반도와 제주도에서 '감저'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대마도에서 종자로 들여오던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제주도는 토질이나 기후가 잘 맞았고 구황식품으로도 적합했다.


감저(고구마)는 제주도의 풍토에 가장 적당한 품종이자 농가 대용식량이다. 수확기가 8~9월이라 태풍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는다.  

- 제주도세요람 1938 조선총독부

5,6월쯤 심어 10월에 수확하는 고구마는 뿌리 식품이기 때문에 태풍의 피해를 적게 받아 제주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 자체로 식품이기도 하지만 주정이나 전분의 원료로 환금성도 있고 전분을 가공한 후 남은 잔여물들은 비료로도 활용되었기에 제주 농가에서는 앞다투어 감저를 심기 시작했다. 가을에 수확한 감저는 집 옆에 1.5m 정도 구덩이를 파서 짚을 깔고 ‘감자 눌’을 만들어 보관했다. 이 ‘감자 눌’은 땅 밑온도 변화가 적어 2월까지도 보관이 가능하였으며 ‘감자 눌’에 보관한 감저는 쌀이 없는 제주민들의 겨울 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제주 동네 슈퍼에 가보면 제주산 감자나 당근, 마늘 등 채소류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제주산 고구마, 즉 감저는 쉽게 찾기 어렵다. 제주에서 팔리는 고구마는 대개 물 건너 육지에서 온다. 어느 때부터인가 제주산 감저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 대표 작물이라고 할 정도로 생산을 장려했었던 감저는 다 어디로 갔고 왜 지금은 제주산 감저를 찾을 수 없을까?


한림면 옹포리 카페 앤트러사이트

제주시 한림면 옹포리에 가면 '앤트러사이트'라는 카페다. 과거 전분 공장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카페다. 홍대 이근 상수동에 버려진 연탄공장을 개조해 만든 '앤트러사이트-무연탄이란 뜻'의 제주 분점쯤 되는 곳이다. 물론 전분의 원료는 감저다.  모슬포에도 전분공장을 개조해 만든 '감저'라는 카페가 최근 문을 열었다. 두 카페의 공통점은 문을 닫은 전분공장이다.  제주 사람들은 전분공장을 '감저 공장'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서귀포 시내에만 세 곳의 '감저 공장'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제가 고구마 심기를 장려한 것은 1910년대부터다. 1913년 600정보에서 1930년  발행한 『제주도 편람』에 따르면 감저는 3,699정보 10,752,095관(1관은 10근 3.75KG)을 생산한 것으로 기록했다.  같은 시기 다른 작물의 재배면적 조 31,078정보, 보리 26,075정보에 비해  확연히 작다. 심지어 쌀 재배면적 4,960정보에도 미치지 못한다. 1938년에는 7,357정보로 늘어난다. 감저는 다른 작물에 비해 적은 노동력으로도 재배가 가능하고 전량 수매해 주기 때문에 제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감저를 심었다. 


매일신보 1924.12. 22

1924년 매일신보는 「미개된 보고- 제주도의 산업」이라는 기사를 통해



감저(甘藷)는 근년가경(近年可驚)할맛한 작부확장(作付擴張)을 견(見)함에 지(至)하얏스니 감저(甘藷)뿐안이라 근(根)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작물(作物)은 비상(非常)히 호적(好適)하니 원래(元來)제주도(濟州島)의 농작물(農作物)은 연연하등(連年何等)인가의 장해(障害)를 몽(蒙)하야 농민(農民)의 식물(食物)에 궁(窮)하는 년(年)이다(多)하얏스니 근년(近年)감저작(甘藷作)의 보급(普及)으로 지금(只今)은 타식물(他食物)에 여유(餘裕)를 생(生)하야 도민(島民)은 대희(大喜)하는 바이다 현재(現在)작부(作付)사천정(四千町)기수확(基收穫)구백만관(九百萬貫)으로 타식물(他食物)을 불요(不要)하고 육십일여(六十日餘)를 지득(支得)할슈 잇다. 
- 매일신보 위 기사    

'감저-고구마-는 최근 경작면적이 늘었다. 감저와 같은 뿌리 작물들은 연작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해에 매우 적합해 최근 감저의 보급으로 경작에 여유가 생겨 제주민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 현재 4천 정보에 총 구백만 관을 수확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1930년까지 감저의 재배면적이 크게 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1938년부터 제주에 대대적으로 고구마 재배를 장려한다.  1938년 1월 13일 매일신보는 제주도에 주정공장 신설을 결정했다는 기사를 낸다. 이 기사에는 가솔린에 무수無水알코올을 섞어 연료로 사용키로 하고 이를 위해 감저를 원료로 하는 무수無水알코올의 증산을 위해 제주도에 주정酒精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술의 원료를 만드는 '주정공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는 동력 기관의 연료로 무수알코올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치키로 한 것이다. 현재도 미국이나 브라질에서는 옥수수와 사탕수수에서 뽑은 알코올을 가솔린과 섞어 연료 사용하고 있다. 중일전쟁에서 이기며 대륙 침략의 야욕을 키우던 일본에 차량과 동력 기관에 사용하는 원료의 공급은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주정공장에서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한 주요 원료는 녹말-전분-이었고 녹말은 감저에서 뽑았다. 결국 감저는 제주도민을 위한 식량원이 아니라 전쟁 물자 보급을 위한 목적으로 재배를 확대한다. 이듬해인 1939년 2월 대정면에 주정공장이 들어섰다. 1939년 감저 재배면적은 해 경지면적은 7천3백57 정보, 수확고는 2천3백4십3만 관에 달했다. 이후 재배면적을 1만 정보까지 늘리기로 계획한다. 1938년 6월 12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도민 결의대회를 통해 주정공장 설치를 건의했다고 보도한다.  조선은 주정공장이 제주 발전의 생명선으로 도 외에 공장을 두면 원료 공급을 거절한다는 도민의 결의(?)를 기사로 싣는다. 


조선일보 1938.6.12

이 기사에 실린 결의문은 첫째로 '연료 국책'과 '제주 개발'을 대국적 견지에서 주정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이미 주정이 어떤 목적으로 쓰일지 도민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후 제주도 산 감저를 전국에 공급해 감저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생산된 감저는 '절간고구마, 일명 빼떼기(얇게 썰어 말린 고구마)'로 전분공장에 넘어간다. 1938년도 경지면적은 7천3백 정보, 수확고는 2천3백4십3만 관에 달했다. 그 해 생산량의 반은 절간고구마로 도 외로 수출, 판매했고 잔여분은 도내 전분 공장에 공급하거나 식량으로 사용했다. 1942년 산남 제일 부자인 강성익이 서귀포에 설립한 제일 전분공장도 그중 하나였다. 이후 대진전분공장(대표 강창학 서복전시관 인근) 등 해방 전후로 송산동 관내에만 3개소에 전분공장이 들어선다. 


정방폭포 위쪽 대진전분공장 /1960년대                                 
제일전분공장(원내) 1948년 위성사진


해방 후에도 전분공장과 주정공장은 주요 농가 소득원으로 자리 잡았으나 1965년부터 생산이 감소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감저 재배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주 경제를 좌우하는 주요 소득작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고구마 전분으로 만들던 당면과 소주 원료로 쓰던 주정이 값싼 수입 산으로 대체되고 감귤이 새로운 소득원으로 떠올랐다. 감저 재배면적은 한때 15,000ha에 이르기도 했지만 1990년에는 3,783ha로 감소했고 현재는 100ha에도 미치지 못한다. (출처: 이성돈 제주 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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