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오늘은 늦잠을 자서 병가를 냈다. 또 모두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 가족은 나를 제외하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 힘들 때면 나를 찾고 의지한다. 나는 이런 나의 역할을 ‘비둘기’라고 칭해왔다. 비둘기 역할을 하면서 내 마음의 병이 심해진 것 같다는 수년간의 생각 끝에 결론이 나왔다.
모두가 나에게 서로의 험담과 서운함을 퍼붓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어줄 뿐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또한 나는 그 누구에게도 험담은커녕 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날 사랑하고 내가 힘들 때 도우려고 하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본인들이라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다.
그래서 애인이나 정신과 의사 선생님만큼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지금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는 그 둘 정도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소중한 친구 W에게도 정말 많이 의지하지만, 참 미안할 때가 많거든.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 친구인데.
그런데 최근, 연속적으로 힘든 일이 닥치는 동안 꼭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날마다 애인은 자리를 비웠다. 귀찮을 정도로 옆에 붙어있던 사람이, 혼자 쉬라는 말을 남겨두고. 그래서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던 나는 약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방문했다. 언제나 남의 일인데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던 의사 선생님은 그날 따라 다가오는 퇴근 시간에 쫓기듯 내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내게 필요해 보이는 약을 급하게 써내려 갔다. ‘사실 할 얘기가 많은데, 퇴근하셔야 하니 다음에 할게요.’라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옅은 끄덕임으로 내 생각이 맞았음을 알려주었다. 나도 나처럼 하소연하는 수많은 환자 중의 한 명일뿐이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면서도 공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잘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사는 것도 참, 쉽지 않다고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