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만의 고향이 있다.
고향! 부끄럽게도 '고향'을 '고양'이라고 쓴 일이 먼저 떠오른다.
잠시 고향을 그리며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동네 어귀에는 '안산'이란 나지막한 산이 있다.
띄엄띄엄 집들 있고 그 둘레를 치마처럼 밭들이 두르고 있다.
소가 끄는 구르마를 타고 조금만 가면 넓은 논들이 펼쳐진다.
봄이면 노래 가사처럼 진달래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곳이다.
나는 진달래꽃. 버들강아지 꺾어다 칠성사이다 병에 꽂아두기도 했다.
밭둑에는 냉이랑 쑥이 아지랑이처럼 새싹이 모락모락 움 돋아 피어오른다.
그 냉이를 캐어 된장을 살짝 풀어 넣고 냉이 국을 끓인다.
푸릇푸릇 한 봄 내음이 입안 가득 남는다. 그 향긋한 냉이 국 지금도 먹고 싶다.
봄이 되면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추워서 겨우내 입어보지 못한 치마를 입는 것이다.
옆집 단짝 친구랑 장롱 깊숙한 곳에 틀어 박힌 치마를 간신히 꺼내 입고 동네 냇가로 간다.
솜털 같이, 애기 손같이 피어난 버들강아지 꺾어오면 아직은 추운데 감기 걸린다고 엄마한테 혼나기도 한다.
아버지와 엄마는 소가 끄는 구루마에 거름을 싣고 논과 밭으로 나가 일하셨다.
여름엔 집 둘레 밭에 푸르른 채소들과 수박 참외가 자랐다.
감나무 그늘 아래에 곱게 짠 멍석을 깔고 누워서 삶은 감자. 옥수수를 먹곤 했다.
어느 때인가는 잘 생기고 고르게 옥수수알이 박힌 놈으로 골라서 나중에 나만 먹겠다고 책상 서랍에 감춰두었다가 잊어버리고 있다가 쉬어서 결국 못 먹게 되는 일이 있곤 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동네 또래들과 시냇가에 물장구 치러 가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동네 친구들이 다 모여 있다. 땅집고 헤엄치면서 누가 더 빠른지 수영 솜씨를 자랑하기도 한다.
가끔 시내에서 구입했는지 수영복이란 걸 입고 오는 애들도 있었다. 특히 꽃장식이 달린 수영모자는 내 마음을 빼앗기 충분하다. 그런 친구가 부럽다. 하지만 대부분 팬티만 입고 물놀이한다.
어쩌다가 여자애들만 있을 때는 그 팬티도 벗어서 나뭇가지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잘 감춰둔다. 그럴 때면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나다. 불행히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어린이 익사사고가 있어서 엄마는 물놀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엄마 몰래 다녀오기도 했다. 아마 알고도 모르는 척해주셨을지도 모른다.
가을엔 품앗이 일꾼들 간식으로 건넛마을 과수원에서 사다 놓은 사과가 항아리 속에 있었다.
으음, 지금도 코 끝에 풍기는 향긋한 사과 내음!
가을걷이하느라 바쁜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도 했다.
논에서 이삭을 줍다가 집 더미 위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도 한다.
추수를 하고 넓게 드러난 논바닥은 금세 우리들의 놀이터가 된다.
논두렁가에서 질척 질척한 논 흙을 뒤적이다 보면 운 좋으면 우렁을 잡을 수도 있다.
진짜 우렁 속에 우렁각시가 사는 것은 아닐까?
혹시, 잡아 다 놓은 우렁 속에서 밤이면 우렁각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어둑어둑 해져가는 가을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는 콩을 거두기 위해서 멍석 깔고 도리깨로 바싹 마른 콩 더미를 두드린다.
그 일은 엄마가 도맡아 하셨다. 튀어나간 콩을 줍는 게 나의 일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그 일이 정말 싫었다.
콩알 하나라도 아까워하던 엄마의 맘을 전혀 모르고 투덜대며 생각했다.
'저렇게 힘든 일을 엄마가 되면 어떻게 하지?'
'저렇게 무거운 도리깨를 어떻게 돌리지?'
'나한테 너무 무거운데...'
나는 그때 엄마가 되면 저런 똑같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왔던 것 같다.
소복이 쌓인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밟고 친척 집에 세배하러 가던 일이 기억난다.
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면 처마 끝에 대롱대롱 고드름이 열린다.
햇볕 따사로운 토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던 친구들은 누가 더 기다란 고드름을 가졌는지 서로 뽐낸다.
간식이 흔하지 않은 시골이라 그것을 얼음과자 삼아 먹어보기도 한다.
보름날이면 쥐불놀이하고 논두렁에 불을 냈다. 불씨가 옷에 튀어 여기저기 구멍이 나기도 한다.
그날은 방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다가올 봄에 농사짓기 위해서 병충해를 없애는 거라고 한다.
아침잠이 많아 해가 중천에 떴을 때나 일어나서 아침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한낮에 빨랫줄에 걸린 홑이불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노라면 엄마의 젖가슴 같은 냄새가 난다.
아하, 햇빛 향기가 담긴 뽀송뽀송한 이불 냄새.
그러다가 잘못 건드려 그 이불을 흙바닥에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엄마의 욕바가지 세례를 받는다.
밤이면 호롱 불이나 촛불로 그림자놀이를 하다가 라디오 연속극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전기가 들어온 거 같다.
이불 홑청에 풀을 먹여 사그락 거리는 소리 나는 포근한 이불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다닥다닥 붙어서 라디오 연속극 소리에 상상의 날개를 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들려주고 싶은 수다한 추억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
안 좋은 기억들 조차도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진 우리 집이 있는 내 고향...
붉은 노을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내 고향.
저녁때면 새들이 화살표 모양을 만들며 둥지를 찾아가는 곳이 내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