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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04. 2024

자연은 순수함을 거부한다

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 : 이성이 추방한 자연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요즈음엔 물리적 현실화가 되어 나타납니다. 어느곳은 토네이도가 불고, 어느곳은 폭우가 쏟아지는 반면에 어느곳은 극심한 가뭄으로 통곡하죠. 자본주의 인류세의 문제적 증상들로 사람들은 자연이 순수함을 잃고 인간에게 등을 돌렸다 합니다. 인간 이성과 자연의 대립이 우리 눈 앞에 현실화 된거죠.

 하지만 우리가 자연에게 부여한 순수함이란 것은 이성의 월권, 즉 이성이 그 힘을 남용한 형태가 아닐까요. 서양철학사에서 항상 문제시 됐던 것은 외부대상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바로 주체, ‘이성적 능력’을 지닌 주체였어요. 언제나 ‘나’라는 주체를 특별화하고 유일화 시켜 하나의 실체로 가능하게 해요. 인간에겐 이성을 통해 여러것들을 분별하고 인식 할 능력이 있다는 거에요.


 하지만 칸트가 이 이성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을 통해서 이성의 능력을 제한시켜요. 우리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 원칙에 따라 분별된 대상들일 뿐이라는 거에요. 칸트의 이런 문제의식이 당시 프로이센으로 들어가 셸링, 피히테, 헤겔에게 영향을 미치고 헤겔로 귀결되는 관념론의 문제는 맑스에게 흘러들어가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한 일은 세상을 이해하려고만 했지 변화시키려 하지 않있다.”라며 유물론을 부활시키죠.

전반적으로 이런 독일 근현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이성과 현실을 조화시키려 한 것이었어요. 즉 이성과 자연의 대립각을 봉합하려 했다는 거죠.

 하지만 칸트, 헤겔, 맑스에게 모두 영향을 받은 1세대 비판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다시 이 이성을 문제삼아요. 어떻게 합리적 이성을 필두로 한 지금까지의 계몽 역사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도 같은 야만 상태로 귀결났냐가 바로 이들의 문제 의식이었어요.


 계몽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상태의 야만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코나투스적 욕망이에요. 이성을 사용하여 외부의 것을 자기와 동일하게 동질화시키고 ‘타자’를 없애는 거죠. 모든 것을 다 나와 동일하게, 나의 의견과 욕망과 일치시키는거에요. 우리는 그걸 계몽이라 불렀고요.

 이런 계몽의 방법도 문제지만 아도르노가 제기한 또 다른 문제점은 그런 계몽적 주체에 타자가 없다는 거였어요. 계몽을 수행하는 주체는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인식하지 못해요. 절대적 자아동일성을 느끼며 내 안에 깃든 부정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긍정으로 귀결나죠.

 그렇게 우리는 합리적 이성의 계몽을 통해서 내부자연을 소외시켰고 외부자연 또한 소외시켰어요. 그러면서 인간이 행한 방법이 무엇이냐면 그 자연을 소유할 수 있고 전유할 수 있다 믿은거였어요. 자연이 더 이상 나와 같지 않은 ‘타자’로 규정되니 저 타자는 바로 내가 계몽을 통해 무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버린거에요.

 

 그렇게 우리는 자연에게 여러가지 이름을 붙이며 보호정책을 펼쳤죠. 자연을 ‘mother nature' '대자연’이라 칭하며 신성시하고 그 숭고함과 순수함을 강조했어요. 그리고 이런 자연은 “오로지” 순수하기만 하기에 인간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 그것의 능동성을 하나 둘 삭제해갔어요.

 자연은 지금까지 순수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감시당하고 수동적 물질로 전락한 채 연명했죠. 하지만 자연이 자신의 힘을 능동적으로 내보이는 지금 인간을 지닌 우리 이성은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앉아서 당하기만 하잖아요. 어쩌면 아도르노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현실화 되는 시점이에요.


 우리는 아마 자연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지도 몰라요. 실제로 요즘 철학계에서 가장 핫한 토픽이 뭐냐면 ‘신유물론’이에요. 지금까지의 유물론은 외부대상이나 자연의 능동성을 거부한 채 수동성만을 부여했다 하지만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의 능동성을 강조하거든요.

 드디어 자연이 지닌 이성적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에요. 자연은 순수하지도 않고, 애초부터 순수하길 거부했죠. 자연은 우리 이성적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실체로써 우리에게 자신의 능동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칸트가 계몽을 무엇이라 정의하냐면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주장해요. 아도르노도 이런 칸트의 계몽을 복고시키는 것이 그의 문제 의식이었고요. 이성은 타자를 나와 동일하게 전환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미성숙의 상태에 있는 나 자신, 인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계몽적 도구에요.

 칸트와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하였듯이 이제 정말 이성을 진실되게 사용해야 할 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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