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 필연적인 것은 없다
서양철학사가 중세에서 근대로 옮겨가는 그 길목에 조밀조밀하고 자잘하지만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이 위치해요. 로크, 데카르트, 루소, 홉스, 흄, 버클리 이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특히나 인식론적으로 굉장히 밀접해 있으면서도 서로 상이한 이론을 내보여요.
프랑스에서는 당시 판을쳤던 회의주의자들인 피론주의에 대항해서 데카르트가 불변의 점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고자 모든 것을 양적화 하여 기계론적 철학관이 탄생하였고 이를 ’합리주의‘라고 불러요. 이성의 힘을 강조하고 이를 토대로 모든 현상들을 인과필연적으로 사유한거에요.
영국에서는 로크-버클리-흄 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가 영국 계몽의 단초를 제공해요. 경험주의자들은 이성보다는 감각경험을 강조하며 합리주의에 대항하는데, 이들이 경험론을 강조했던 이유는 정치철학적으로 혈통주의적 권력관계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영국 경험론자들 중에 우리는 흄의 사고에서 굉장히 친숙함을 찾을 수 있어요. 흄의 이론은 불교의 이론과 굉장히 유사하거든요. 흄은 ‘자아존재’ ‘외부대상존재’ ‘인과필연성’ 이 모두 합리적 필연성이 아닌 습관에 의한 경향성이라고 논증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축구공을 발로 차면 뻥 하고 날아간다는 것은 인과적 필연성이 아니라 그저 습관에 의한 상상력에 불과하다는 거에요. “이전에도 축구공을 찼을 때 앞으로 날아갔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거야” 라는 방식으로요. 수차례의 경험을 관찰하며 정초된 것이기에 귀납적이죠.
그러니까 합리적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은거에요. 모든 것은 내가 그때그때 경험하는 현상에 의한 것들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으로 동일하고 항상적이지는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흄에게 무언가에 대해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아주 생생한 인상을 갖는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거고 그 생생한 인상이 없다면 관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거에요.
그렇기에 흄에게는 신도 존재하지 않죠. 감각 기관으로 경험한 신에 대한 생생한 인상이 없으니까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아존재 또한 마찬가지에요. 우린 영원히 ‘나’에 대해 알 수 없어요. 나에 대한 일관되거나 생생한 인상을 가질 수 없어요. 우리가 마주하는 나는 거울에 비친 반성적 나일 뿐이고 누군가에게 비친 나일 뿐이죠. 완전히 동일한 나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기에 흄은 이 자기동일적 자아를 부정해요. 그런건 없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저 특정한 경험 속에 주어진 단편적인 나에 불과하다는 거고, 그렇기에 ‘나’라고 불리는 자아는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거에요. 정말 불교의 ‘무아’ 그리고 ‘연기’와 닮아있죠.
흄은 지나치게 경험주의를 강조해서 결국 회의주의로 귀결나요. 그럼에도 흄은 그동안의 전통적 인간상, 즉 합리적인 이성을 지닌 인간상을 무화시키고 감정적이고 습관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성 능력의 한계를 증명해보여요.
이는 칸트를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웁니다. 칸트도 스스로 흄이 없었더라면 내 이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이 흄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적고 있어요.
흄은 칸트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요.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사유와 밀접해 있기도 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