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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2. 2024

내 안의 타자, 타자 속의 나

헤겔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는데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정반합'이라고 도식화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접근법이고 헤겔 전공자들은 이런 도식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사실 헤겔 이전에도 변증술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것을 언급하고 칸트도 그것을 언급해요. 하지만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그것을 정식화하서 자신의 논리이론으로 정립하는데, 이후 독일 지성사는 변증법을 기반으로 한 변증법론자들이 주류를 점합니다. 대표적으로 실천적 유물론자인 맑스가『자본』을 기술하면서 자신이 헤겔 『대논리학』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언급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감성적 유물론의 대표주자 포이어바흐도 변증법을 자신의 논리체계로 택하고 있고요, 맑스 이후에 등장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도 헤겔류의 긍정변증법을 뒤집으며 『부정 변증법』과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변증법 기반 이론을 채택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증법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사실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요. 저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통해 '주노변증법'을 배울 때 "그래서 이것이 변증법이다."라는 명확한 설명과 정의를 들은 적이 없는데, 변증법은 우리가 그 개념에 다가가서 그것을 적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깃들어있는 변증적 요소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그런 류의 철학 개념이라서 도처에 변증적 요소들이 편재 해 있습니다.

 보통은 '서로 대립되는 모순항들의 조화'로 많이 설명을 하고 그렇기에 이를 도식화하면 '정반합'이라는 테제가 도출되는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렇게 도식화를 시켜버리면 문제점이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헤겔의 이론을 전체주의 환원론으로 이해하기가 쉬워요. 변증법에서 최종적 요소에는 그 어떠한 대립물도 폐기되지 않은 채 지양된 단계로 귀결나며 그것이 무한동력을 지니고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양(aufhaben)해가는 형태를 취하게됩니다. 여기서 '지양'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수정하고 보완하고 또 고양시켜 한단계 더 도야시킨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런 기술법들이 『정신현상학』과 『법철학』에 여럿 등장하는데, 특히나 『법철학』에선 사회 구성 원리를 '보편' '개별' '특수'로 설명하거든요. 이 모든 것들이 지양되여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을 이룬다는 건데, 변증법을 저렇게 도식화로 인지하면 여기서 헤겔이 전체주의적 국가를 옹호한게 아닌가? 라는 잘못된 비판이 도출되죠.

 헤겔이 변증법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엔치클로페디』에서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증법적인 것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유한적인 것이 고정된 궁극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유한자의 변증법에 다름 아니다. 유한한 것은 즉자적·본원적으로 자기 자신의 타자인 까닭에 바로 이 변증법에 의해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초극되고 자신의 반대물로 전화한다."

 이걸 이제 또 다른 말로 "내 안의 타자" "타자 속의 나"라고 말하는데, 이걸 보통 사랑에 빗대어 많이 표현해요. "사랑은 자아가 (개체로서의) 자기를 상실하는 동시에 자기를 (좀 더 넓은 전체의 부분으로서) 발견하거나 획득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기-양도의 계기와 또한 자기-발견의 계기를 포험한다."라고 헤겔 연구의 권위자 바이저는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랑은 이렇게 동일성의 계기 뿐 아니라 '차이'의 계기도 포함되죠. 사랑의 전제는 일단 '나'라고 정립하는 자아와 '너'라고 정립되는 타자라는 차이에서 부터 시작하고 그것이 결국 전체를 이뤄 유기적으로 합쳐진다는 점에서 결국 그 통일의 과정 전반에 걸쳐 '차이'는 절대 폐기되지 않아요. 다만 지양될 뿐이죠.


 사실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이거야'라고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헤겔의 철학적 이론들과 담론들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증법에 편승하는거에요. 헤겔에게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맑스의 『자본』을 읽다보면 '그래서 어디서 변증법을 찾을 수 있는거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변증법은 이런 식으로 찾고 명확히 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을 읽어내려가는 과정 전체가 하나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 있다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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