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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2. 2024

인문학이 필요를 증명해야하는가?

쓸모와 필요의 역설

 저는 인문학의 존재 이유, 특히나 철학의 존재 이유는 각인들의 의식적 주체성과 능동성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정규 교육에서 가르치는 윤리학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의식적 능동성이라는거에요. 윤리학은 “이거 해” 혹은 “이거 하지 마”와 같은 명령 형식으로 주입됩니다. 칸트의 윤리학만 봐도 그렇죠. 하지만 철학은 그보다 더 큰 외연과 내포를 지니고 있어서 “이거 해” ”이거 하지 마“라는 테제에 “왜” “어떻게”를 질문해요.


 더욱이 한국의 인문학은 초중고 12년의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며 개인들의 질문과 비판을 봉쇄했습니다. 국어 시간에 어떠한 문학작품을 읽을 때 그 필체의 내부 구조릉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형식적 문제를 푸는 방법을 배우지 그것들을 읽고 논평하거나 논술하며 자기만의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진 않아요. 예컨대 ‘청산별곡’은 무조건 이렇게 해석해야하고 이게 정답이야. 라는 주입식 인문학을 배웁니다.


 즉 인문학은 필요와 효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필요와 효용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데올로기인지 우리는 탐독해 볼 필요가 있어요. 사회 구조 속 필요와 효용을 과연 우리 각인들이 생산해내는 것인가요, 그러기보단 국가와 사회가 그런 담론들을 생산합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인문학 예산 삭감, 무전공 선발 등의 정책들로 말 그대로 상품으로서 기능을 하는 학문만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고 그마저도 학문 전범위적으로 예산을 삭감하며 학문위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도태되지 않게 여러 정책들과 규제들에 비판을 가하며 목소리를 내죠. 철학은 이러한 발화 담론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근저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 세상을 이해하고 탐독하며 더 나아가 비판하고 변혁시키려는 것은 도처에 존재하기에 철학의 탐구 대상은 그 모든 것입니다.


 주입식 인문학은 각인들을 완벽한 부품적 의식으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했어요. 사람들은 점점 더 정치에서 소외되고 배제되기를 바라고 4년 5년마다 행해지는 이벤트성 정치참여도 귀찮고 쓸모없는 한표라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자본의 필요, 사회와 국가의 필요에 순응하며 효율, 효용, 필요 라는 단어에만 응답하는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지배계급의 필요에만, 우리 사회 공동체의 필요에만 응답하는 확증편향적 지성인과 대중들 그리고 학문을 키워내는데에 급급해요. 그래서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의 부정태들을 서술하며 민주주의를 외친 맑스의 이론이 한국에서는 폐기되었습니다. 철학사에서 유물론은 언제나 이단취급을 받아왔고요, 사회구조가 필요로 한게 이성이기에 감성과 감정은 언제나 소외되었습니다.


 인문학도, 특히 철학도 세계 조류에 발빠르게 편승해야 한다는 지적은 철학을 부품적 학문, 상품적 학문으로 치부하며 비판의 권리를 몰수해가는 것과 동일하다 생각해요. 철학은 언제나 세계 조류에 가장 밀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의 비판적 행위,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담론들, 더 좋고 행복한 삶을 위한 행위와 담론들의 근저엔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고 변혁시키려 했던 철학이 그 담지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문학도 필요에 응하라는 비판은 비판으로 성립되지 못한 채 비난으로 전락하며 철학을 그저 과학의 하수인으로 취급하는 근세적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 한 구시대적 사고가 아닐까요. 철학을 수학하는 이유는 내 주체성을 확립하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언표들의 행진을 창출하기 위함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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