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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4. 2024

민주주의는 없었다.

소외된 우리, 소외를 희망하는 우리


 한국은 시민사회 헤게모니가 거의 없습니다. 일단 정치적으로는 국가의 대외의존도가 강력하게 높고 그렇기에 일제시기부터 지주, 기업과 국가의 끈끈한 연맹이 형성되어 근대화를 표지로 시민과 노동자계급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 결과 시민사회는 두 배 이상의 소외와 배제를 겪어야 했으며 이러한 증상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현전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탈현대의 지평이 아닌 근현대의 지평에 서 있음을 명확히 느끼죠.

 즉 10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한국 사회는 완벽한 부품적인 시민들을 생산해내는 정치사회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결과 그 역사적 블록에 갇혀 시민사회의 담론들은 영양가 없거나 형성이 되지 않으며 진중한 논의들은 음지로 향합니다.

 여기서 영양가가 없다는 것은 오픈 강연이나 사회 운동에 있어 ‘우리’의 문제는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배제된다는거에요. 반도체가 어떻고, 기업이 어떻고, 정치인들이 어떨고 등의 “이성적인” 말들만 오가며 현실성을 찾지 못한 채 우리는 시민사회 속에서 조차 우리의 주체를 성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시민사회의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수준의 척도입니다.

 가령 정부가 그린뉴딜을 논할 때 각인들의 구체적 삶의 양태에 관하여 논하는지 묻는다면 전혀 아닙니다. 기업이 어떻게 해야 하고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고 규제가 어떻고 수치가 어떻다만을 논하고 이를 척도로 각인들의 구체적 삶을 규제하고 호명하죠. 그렇다고 사회단체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양태를 논하나요? 아니, 이 마저도 기업을 규탄하고 정부를 규탄하고 수치와 규제를 규탄하는 형식으로 잔류합니다. 정말 진정으로 ‘우리’의 존재론적 층위를 밝히는 시위와 파업은 묵살당하고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찍혀요.

  여기, <바로 이 지금> 사회운동은 ‘집회’의 지평이 아닌 ‘시위’의 지평에 서 있다는 거에요. 이는 촛불 “집회”로 명확히 드러난 바이죠. 다시 말해, 국민들의 담론들은 그저 지배계급과 부르주아의 담론들과 이해관계를 제창하고 있기만 할 뿐 그것을 넘어 자신들만의 헤게모니와 담론들을 잉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민주주의의 형재성을 지목하는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가 있었어요. 우리가 이것을 시위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의 입으로 그저 법조계와 지배계급의 단어인 “탄핵”만을 요구했기에 혁명 이후에도 바뀐 것 없이 세상이 그대로이기 때문이에요.-인권 발명의 오류는 여기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만일 그곳에서 시위가 아닌 집회가 열려 상시적으로 ‘탄핵 이후의 더 나은 대한민국’을 논했다면 촛불 집회는 시위라는 오명을 벗고 당당히 “민주주의의 현재성”을 쟁취했을지도 모르죠.

 민주주의는 이처럼 누군가의 말을, 권위자와 이데올로기의 말을 동어반복의 형식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것을 요구하는 행위에요. 민주주의의 어원을 따라가보면 거기엔 권력과 단초를 뜻하는 단어인 arche가 부재합니다. 즉 민주주의는 소수의 권력집단이라던지 권력의 정치라는 것이 불가능한 체제에요. 이걸 다시 바꿔 말하면 각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발언하고 통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각인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위해 각인들이 직접 나서서 통치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요.

 4년, 5년마다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단어를 우리는 지금까지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에요. 그렇다고 우리가 투표한 정치인들은 우리의 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가에 대한 물음에도 당당히 ‘네’라고는 답변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4~5년 마다 한 번 열리는 선거는 우리가 유일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날이지만 이러한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들은 곧장 우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못한 채 연대의 고리가 끊긴다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역설이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이 잘못된 민주주의라고 지적하지 않아요. 그냥 거기에 순응하고 이것이 진정으로 내 정치적 권리라는 것을 주입받으며 살아가요. 그렇게 우리는 또한 ‘우리’에서 소외되길 희망합니다. 매번 사사건건 정치에 관여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에요. 그렇기에 정치에서 소외되고 배제되기를 희망하고 무관심한 대중으로 전락해버리죠.


 하지만 정치는 소수의 참주정 집단들이 아닌 우리의 담론들을 담은 우리의 것입니다. 정치는 우리의 구체적 삶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법과 제도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더욱 용이하게 보조하고 규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정치는 저들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기에 정치는 우리의 삶 곳곳에 편재되어야 하고 그 편제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정치는 주 혹은 달마다 열리는 가족회의의 형태로, 직장 내 회의의 형태로, 상설 평의회의 형태로 자리해야 하며 이는 실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양태이기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려, 정치는 말logos이기에 우리와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는 거에요. 정치는 우리의 관계적 삶의 분열 양상을 조화시키기 위한 대화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민사회 속 잃어버린 정치의 복고는 그람시의 주장처럼 정당의 형태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생물학적 삶에서 정치적 삶으로 고양되어가는 형태가 아닌 생물학적 삶과 정치적 삶의 공존이 실현될 때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의 주장처럼 치안이라 불리는 아르케의 정치를 해체하고 정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에요.

 민주정에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발언권을 지니지 못 한다는 것은 허황된 아데올로기입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익을 탐닉하는 각인이기에 충분히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민주주의 시민사회에서 언론의 의견이, 정치가의 의견이, 기업의 의견이, 교수의 의견이, 엘리트의 의견이 중요하고 공신력 있고 정확하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치는 사념들의 불화와 대립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 이에요. 더 나은 민주주의의 국면에서는 국가가 국민들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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