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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7. 2024

절대성의 무화

변증법 : 고대, 근대, 현대의 차이

 우리가 흔히 변증법이라고 하면 헤겔의 것을 직관적으로 떠올립니다. 헤겔은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의 간극을 좁혀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렇게 결과로 지목된 변증적 유기체가 다시 하나의 동기로 전화되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것으로 이해돼요.

 하지만 변증법은 헤겔 이전에도 존재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변증“법”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어요. 변증“술”, 변증“론” 혹은 변증“학”으로 불렸습니다. 그렇기에 변증성을 뜻하는 단어 Dialectic을 마주한다면 어떤 학자가 어떤 의미로 그것을 사용했는지 주의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번 글을 통해서는 Dialectic이 서양 고대-근대-현대를 거치며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간단하게 그 계보를 따라가보려고 해요.


 먼저 고대로 향합니다. 고대에서 변증술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선배 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우리가 ‘엘렝코스’라고 알고 있는 그것입니다. 엘렝코스가 뭐냐면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답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만을 가하는 거에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등에라는 별명이 있었을 만큼 이 엘렝코스를 통해 아테네 시민들을 엄청나게 괴롭혔어요. 근데 그의 목적은 그들을 비꼬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히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엘렝코스의 참여자는 계속하여 무엇에 대해 주장해요. 예컨대 “악은 없어” 라고 소크라테스에게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재해 소크라테스는 묻는거에요. “악의 본질이 무엇이냐?” 라고요. 그러면 상대는 구체적 상황이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가며 근거를 제시할거에요. “두려움에 굴복하여 용기를 발휘하지 못 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 라고 근거를 들었다고 해 봅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또 물어요. “그렇다면 용기란 선인가?” 이렇게요.

 이렇듯 소크라테스는 한 개념의 본질을 찾기 위해 엘렝코스의 상대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상대는 결국 아포리아의 상태에 빠져 혼란스럽게되죠. 즉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엘렝코스’라고 칭해지는 대화법이었고, 이것의 취지는 객관적이고 참된 진리(본질)을 찾기 위해 상대에게 “너는 그것에 대해 정확히 아는가?” 라고 질문하는거였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철학자로 학문의 체계와 범주들을 설정하여 첨예한 철학을 행합니다. 그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술을 학문으로 정립하죠. 우리가 아는 『논리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자 변증술이 학문으로 정립된 바로 그 지점이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술의 정의를 소크라테스와 동일히 합니다. “변증술이란 질문자와 답변자가 담론을 통해 사물과 현상의 실체와 진리를 파악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이 병증술의 규칙들을 하나 하나 제시해가며 학문의 지위로 끌어올려요.

 가령 변증술은 말에 대한 말의 대립이고, 유와 종의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여야 하고, 상대방을 논박하는 동시에 자신의 논의가 바르게 정립되도록 해야 하고, 사물들의 고유 속성과 주어와 술어의 관계 등을 방대하고 치밀하게 제시합니다.


 이렇게 학문으로 정립한 변증술은 근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칸트에게로 넘어가 변증학(백종현 번역본), 혹은 변증론(최재희 번역본)으로 으로 정립되어요. 칸트는 이 변증학을 가상의 논리학으로 치부합니다. 칸트의 변증학은 “초험적 판단이 가상인 까닭을 폭로하고 동시에 이 가상에 속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에요. 즉 칸트에게 있어 변증적이다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정적 함의를 내포합니다.

 칸트의 이런 정의에 따르면 변증적이라는 것은 이성이 가상에 빠져 이도저도 못하는 아포리아상태에 빠진 것을 뜻해요. 즉 칸트에게 있어서 또한 변증은 모순이자 대립이고, 칸트는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모순, 대립에서 그 단초를 찾아 자신의 변증법 진리를 탄생시킨 헤겔은 칸트를 비판해요. 칸트가 변증성을 논할 때엔 주관적 이성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거에요. 즉 칸트에게는 주관적이성과 객관적이성 사이의 변증적 관계가 결여되어있다 논하며 변증법을 ‘주관적 자아와 세계 이성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타자의 관계’로 정립시킵니다. 쉽게 말해 헤겔은 관계성 속의 변증성을 포착한거에요.

 윤리학적 논의로 예를 들자면 헤겔은 칸트 윤리학에 있어 ‘주관적 도덕Moralität'만이 존재한다 논합니다.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은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주관적 의지의 절대적 의무를 제창해요. 그러면서 헤겔은 칸트가 혼용하던 ’인륜Sittlichkeit'과 ‘도덕Moralität'의 개념을 분리시킵니다. 도덕은 변증적으로 제도화된 인륜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의 실재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죠.

 헤겔은 칸트가 포착하지 못 했던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관계성을 포착하며 칸트가 실패한 예지계(자유)와 감성계(필연/현실)의 균열을 인륜을 통해 봉합시킨거죠.


 이렇게 변증성을 뜻하는 Dialectic은 학자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그 사용법과 정의가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모순’ ‘대립’을 통해 절대적 객관성을 무화시키거나 지연시키고 상대방이 ‘앎’이라 주장했던 것을 재고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고대의 변증술은 담화를 통해 사물이나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는 논리였고, 근대 칸트의 변증학은 주관적 이성의 상태를 논하는 가상의 학문이었으며, 현대 헤겔의 병증법은 주관과 객관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하는 논리로 지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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