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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17. 2024

자유는 어떻게 실재하는가

칸트의 윤리학

 저는 원래 칸트를 굉장히 싫어했어요. 정말 할 수 있을 때 까지 칸트를 수학하는걸 미뤄야겠다라고 생각했을 만큼 너무 형식적이고 갑갑한 이론이라는 편견에 갇혀서 칸트나 관념론 철학을 배척했는데, 최근 칸트의 저작을 읽어볼 기회가 생겨서 반감과 편견을 안고 읽어내려가며 강연도 듣고 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칸트의 실천이성 논증의 신비화된 오염을 벗기고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기회였어요.


 칸트는 인생사에서 굴곡이 없다싶이 한 철학자에요. 이 사람 인생은 정말 뭐가 없어요.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고, 다들 익히 알듯이 시간엄수에 굉장히 철저한, 요즘으로 치면 극 J의 표본이었죠. 한평생 학문에 전념하여 독신으로 살며 원없이 수학했던 모습이 정말 부르주아 학자의 상과 꼭 빼닮았습니다.

 철학적 텍스트로는 윤리학적으로 해석되는 『실천이성비판』 보다는 인식론적으로 해석되는 『순수이성비판』이 더욱 활발히 연구되지만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 있어 실천이성을 더욱 우위에 두었습니다.

 순수/실천 이성이 뭐고 비판이 뭐냐 하면, 우선 실천이성과 대립하여 바라본 순수이성은 이론적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미와는 상이합니다. 칸트는 비판이라는 단어를 쓸 때 고대 그리스어가 함의하는 ‘나누다’ ‘분할하다’ 라는 본 뜻으로 비판을 사용하기에 순수이성비판은 칸트 이전의 전통적 이성의 월권에 대한 비판, 즉 우리의 이론적 이성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에 대한 분할을 말하는 것이고, 실천이성비판은 우리가 실천적으로 무엇을 행위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분할하는 거에요.


『도덕 형이상학 정초』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의 실천철학인 윤리학이 전개되는데, 칸트 윤리학의 주된 문제의식은 바로 자유에요. 자유는 경험되지도 않고 관찰할 수도 없는 물자체의 영역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라는 거에요. 그렇기에 그의 윤리학은 자유를 규제적 이념으로 요청하여 그것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둡니다.

 근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가 있어요. 우리가 흔히 칸트를 알기로는 ‘의무’ ‘명령‘으로 도덕행위를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자유가 성립하고 이것과 양립가능하냐라는 거에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칸트는 이 자유가 곧 도덕법칙의 의무에 따르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우선 칸트의 이분법적 전제를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해요. 칸트는 예지계(자유/객관/보편/비경험적)와 감성계(필연/현실/개별/경험적)의 이분법을 가장 기초적인 믿음으로 전제해요. 여기서 도덕법칙의 정언명령이나 자유, 신, 영혼은 감성계가 아닌 예지계의 개념에 속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뤄진 감성계에 살고 있어요. 그렇기에 정념과 욕망에 사로잡히죠. 이제 조금 감이 오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칸트가 자유를 논할 때는 이런 정념과 욕망을 억누르고 양심의 의무에 따라 선의지를 행하는 상태를 자유라고 칭해요. 이게 정말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자유라는 명사에 따라붙는 전치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워요. 우리는 구어체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로부터‘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그 상태를 지목하죠. 영어로도 ‘free from'이잖아요. 어떠한 상황으로부터의 탈피를 우리는 자유라고 논해요. 그러니까 칸트의 저 주장, 정념과 욕망으로부터의 탈피가 곧 자유라는 것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칸트의 자유 개념은 영혼, 그리고 신 개념과 함께 이론적으로 순수이성을 통해서는 증명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들을 경험할 수 없기에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알 수 없고 그렇기에 지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이것들의 실재성을 증명해요. 칸트가 자유, 신, 영혼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방법은 우리가 그것들을 요청해서 ‘마치 그것이 있는 것 처럼 행동한다’라는 거에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경향성을 지닙니다. 각 개인들의 행동들과 사유 그리고 환경이 다르더라도 “그렇지만 이건 해야 해!” 라고 생각되는 도덕적 행위들이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도덕법칙에 입각한 보편적 행위라는 것이고 우린 그 행위를 행할 때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과 정념을 억누르고 우리의 의지에 입각하여 그 도덕법칙의 의무를 행하죠.

 이렇게 각인들이 서로 상이한 감성계를 지닌다 하더라도 이성적 존재자라면 도덕법칙을 따르려는 하나의 필연성과 보편성이 관찰돼요. 그렇기에 보편적 예지계의 물자체에 속하는 자유와 신 그리고 영혼 개념의 요청들 또한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거에요.


 앞서 순수이성으로는 자유의 개념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인식론적으로 그것은 물자체의 영역에 속하기에 지식의 대상 즉, 앎의 대상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도덕법칙의 경외감에 입각해 현실계에서 그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때 자유를 느껴요.

 자유는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철학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명되어야 하고 증명되어야 할 개념이에요. 자연법칙에서 탈피하여 윤리적 행위를 행하고 정치적 행위를 행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를 지니고 행하는 관찰과 실천이 필요해요.

 또한 자유를 통해 우리 인간이 그저 자연법칙, 인과법칙에 종속된 존재가 아님이 증명돼요.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우리가 인식할 때 그것들은 인과관계에 의해 포착되죠. 하지만 인간은 한 편으로는 인과관계에 의해 종속되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이 근거로 칸트는 양심의 가책, 후회라고 불리는 의지이자 감정들을 들어요. 우리 인간은 이미 벌어진 특정한 과거의 상황에 대해 “그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텐데”라며 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죠. 이러한 도덕법칙, 양심의 경우를 통해 이성적 인간인 우리는 그저 자연법칙에 종속된 객체가 아닌 예지계 또한 횡단하는 자유를 지닌 존재임이 실천이성적으로 증명되는거죠.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요. 이 자유라는 것이 어찌됐든 결국 명령으로 귀결난다는거에요. 물론 칸트의 이 정언명령은 재귀적이어서 명령하는자와 그것을 행하는자가 동일하게 ‘나’이고 그렇기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명령이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개인들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명령’이자 ‘의무’잖아요.

 또한 도덕법칙이 예지계와 감성계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 했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유는 그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허구적 구안물에 불과하다고 니체와 헤겔을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엄청난 비판을 가하기도 해요.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뤄보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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