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의방(倚邦) 보이차
. . . 의방의 역사와 조당제(曹當齋)
보이차(普洱茶)를 연구한 지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2020년, 2021년은 코로나바이러스-19로 보이차산 투어를 갈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아쉽다. 그동안 의방(倚邦)은 2번 다녀왔는데 다시 가고 싶은 차산 중의 하나이다. 가는 길이 너무 험했지만, 토속적인 마을 풍경 때문에 좋아했다. 최근에 갔을 때 마을 전체가 현대식으로 바꿔 주민들의 주거생활은 매우 편리했겠지만, 반면에 의방의 유구한 역사가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향후 관광자원으로 복원할 때 후회할지도 모른다.
의방(倚邦)은 서쌍판납주(西雙版納州) 맹랍현(勐腊县) 상명향(象明鄕)의 가장 북쪽에 있다. 경홍시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정도를 가면 이무(易武)가 나타나고 다시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1시간 30분 정도를 가면 상명향이 반겨준다. 상명향에서 곧바로 4륜 지프로 약 2시간 정도 좁은 깊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구름 아래 산 중턱에 과거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3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의방이었지만, 이제는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을 했다.
청나라 시대의 의방 일대는 19개 마을에 인구가 9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차(茶)를 채집하는 봄철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과 노동 인력까지 가세해 20만 명 정도가 의방에 모였다고 한다. 현재 의방을 포함한 13개 마을에 220가구에 95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의방은 동서 방향으로 길이 250m이고 너비는 12~16m의 번화가였으며, 동쪽은 이무, 서쪽은 혁등, 남쪽은 만전, 동남은 만송과 이웃하고 있으며 동북 방향은 사천성, 서쪽은 사모의 차마고도로 연결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의방가(倚邦街)를 용의 모양으로 설계하였는데 용머리에는 관청, 용 등은 도로, 도로 옆으로 소수민족의 집, 용 꼬리에는 큰 느티나무를 심었다. 의방 옛 거리는 건물을 지었던 주춧돌, 용의 목을 상징했던 돌계단, 퇴락한 관아 건물 앞에 방치된 돌사자, 오랜 세월을 풍파 속에서 견딘 느티나무 등이 의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청(淸)나라 옹정 10년에 보이차가 북경 황실에 공차로 지정되면서 의방은 명성이 높았다. 이 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의방은 명나라 초기에 이미 차산이 형성되었고, 태족(泰族), 합니족(哈族尼), 이족(彝族), 포랑족(布朗族) 등 소수민족이 거주하면서 보이차를 생산했다. 명(明)나라 말기에 사천성(泗川省)의 한족(漢族), 이족(彝族)이 의방으로 이주하면서 사천성의 소엽종 갖고 와 재배했다. 소엽종 찻잎으로 만든 만송(曼松) 보이차는 청나라 황실에 공차가 되었고, 의방은 구(古) 6대 차산의 중심이 되었다. 청나라 옹정 7년 1728년에 지방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서쌍판납주에 개토귀류(改土歸流)를 시행하였고, 의방은 지방 토호였던 조당제(曹當齋) 때문에 황궁으로 진상하는 금과공차(金瓜貢茶)의 주요 산지가 되었다.
보이차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차마고도(茶马古道)의 기점인 서쌍판납주 맹랍현(勐腊县)에 있는 이무고진(易武古镇)에 갔다가 의방(倚邦)을 가야 비로소 구(古) 6대차산(六大茶産)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무(易武)는 의방이 쇠락한 이후 유구한 역사와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영예를 받으면서 한때 보이차의 성지로 알려졌다. 중국의 운남성 이무(易武)에서 의방(倚邦)을 빼고는 보이차의 역사를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의방은 역사적인 지역이다. 이제는 한낮 유명한 보이차 산지로 남게 된 것도 다행이고, 향후 보이차 역사 속에서 빛을 볼 것이다.
의방은 보이차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많은 역경을 겪고 많이 황폐되었으며 보이차의 명맥도 맹해(勐海)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무를 중심으로 하는 구(古) 6대 차산과 맹해를 중심으로 하는 신(新) 6대 차산이 탄생하게 된 것도 의방의 몰락이었다. 찬란하게 발전했던 의방의 고수차원은 1856년 무고한 회교도 4,000여 명을 참살한 ‘곤명 대학살’로 일어난 회족의 판데(Panthay)의 난, 중일 전쟁, 중국의 내전 그리고 중국 문화대혁명으로 명성이 사라지는 듯하였지만, 지금까지 의방 차산의 보이차가 명품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자 노력한 조당제(曹當齋) 후손들과 소수민족의 강한 생활력 때문이다.
조당제(曹當齋)는 의방 보이차의 역사이다. 필자가 조당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조당제의 집과 무덤의 비석을 어렵게 찾았다. 과거 조당제의 집은 흔적만 남아있고 보기에도 초라한 집에서 주민이 살고 있었다. 현지인에게 물어서 밀림 같은 산속의 무덤을 찾았는데 도굴되어 겨우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초라했다. 조당제가 사망한 후 청나라 황제가 내려준 비석도, 화려했던 무덤도 누구도 돌보지 않아 산속에 버려져 역사적 뒤안길에서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조당제는 사천사람으로 의방에서 보이차 사업으로 성공했다. 그는 성실하고 꼼꼼한 일 처리뿐만 아니라 품성이 뛰어나 의방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의방의 소수민족 이족(彝族) 두령이 조당제에 푹 빠져 옥처럼 키운 무남독녀 딸과 결혼시켰다. 장인이 죽자 지위를 승계하면서 의방의 발전과 소수민족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 편에서 충성을 다해 공을 세웠다.
청나라 정부는 개토귀류과정에서 조당제를 의방토천총(倚邦土千總)로 책봉했다. 토천총 조당제는 유락·의방·망지·만전·혁등 5대 차산의 관할권을 받았지만, 청나라 정부는 이무차산은 이무지역 토파총(土把總)이 직접 관리토록 하였다. 청나라 옹정 13년에 운남성 총독은 조당제에게 공차의 모든 관리를 맡기고 이무 토파총이 협조하도록 명하였고, 토천종의 직위는 세습제여서 조당제 가문은 11세대 16명이 5대 차산을 약 300년 이상 관리했다.
의방은 크게 번성하였고 전성기에 의방의 거리는 관제묘(關帝廟), 석병회관(石屛會館), 사천회관(四川會館), 초웅회관(楚雄會館), 조가대원(曹家大院) 등 상인회 형성되었고 홍창(鴻昌), 경풍화(慶豊和), 경풍익(慶豊益), 원창(元昌) 등의 차창이 고급 보이차로 명성을 얻었다.
19세기 후반 의방도 1937년 일본의 침략으로 차의 교역이 중단되면서 모든 차창이 점점 이주하거나 폐업을 하였고, 1942년 공산당 모택동과 내전을 벌인 장개석 국민당이 의방을 통치하면서 기낙족(基諾族)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지 반발하여 국민당이 있는 의방을 공격해 마을에 불을 질러 3일 밤낮으로 불타면서 몇백 년에 걸쳐 형성된 아름다운 건축물이 잿더미가 되고 의방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의방은 해발 1,950m에 있으며, 고차수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차산은 마율수(麻栗樹), 의방(倚邦), 만공(曼拱)이 있다. 현재 만공 차산은 차나무 생장에 가장 좋은 자연환경과 고차수가 많이 있으며, 산속 깊숙이 위치한 대수림(大樹林) 마을은 이족이 20여 가구 살고 있다. 또한 만공에서 4km 떨어진 대흑수림(大黑樹林) 마을은 조당제(曹當齋)의 후손들이 2가구가 살고 있으며, 만공 차산보다 해발 100~200m 이상에 있다. 대흑수림의 마을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야생 고차수가 많고 고품질의 보이차를 생산한다.
저자는 의방의 느티나무 아래에 사는 이족 농가를 방문하였는데 무우 시래기를 대나무 발에 매달아 놓은 모습이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과 같아 매우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수령 300년 이상 된 고차수에서 채집한 보이차를 산 아래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이는 마당 한가운데 앉아서 여유롭게 시음을 했다.
. . . 의방 고수 보이차 시음기
2019년 춘차 고차수는 소엽종으로 쇄청모차였다. 외형은 검고 밝으며 비교적 짧고 가늘며, 잎 뒷면에 흰 솜털이 많았다. 찻물 색은 황록색으로 맑고 밝은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산야 기운은 신선하고 힘찬 기운이 비교적 강하게 차고 올라왔으며, 깊은 산속에서 힐링하는 기분을 느꼈다. 향기는 은은한 꽃향, 난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찻잔에서 풍기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단향이 긴 여운을 남겼다. 맛은 입안에서 처음부터 부드러운 단맛이 쓴맛을 살짝 넘어서면서 오랫동안 지속되고, 후운은 달고 매끄러운 단맛이 장시간 지속되었다. 우린 잎은 황록색으로 균일하며 윤택이 있어 고수차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무로 돌아오는 2~3시간 동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난향과 단맛이
입안 가득히 퍼져오는 것을 느끼면서
의방 보이차의 품질과 매력에 깊숙이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