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 날의 문] 7살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1)
누구나 한 번쯤, 오래 닫아둔 문 앞에 서 본 적 있다.
20%의 가능성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능성 안에 머물러 있었고
그 밖으로 나오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나는 도망칠 수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대신 문을 만들었다.
의사는 가능성이 20%, 희박하다 했지만 아빠는 살아 돌아왔다. 대부분의 위를 절제했기에, 몇 달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아빠가 반복하는 대사가 변했다. 동사가 바뀌었다.
“니년놈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내가 암에 걸리겠다.” 에서 “니 때문에, 내가 결국 암에 걸렸다.”로 바뀌었다. 그 문장은 이전보다 짧아졌지만, 더 직접적이었다.
그렇게 고3이 되었다.
고3이 되면 세상이 달라지는 줄 알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끝없이 경쟁해야 하며, 대학교 갈 때까지만 이겨내면 된다고. ‘어떻게 더 참고 버텨야 하는 거지?’ 고3 이 되었고, 새 교실에 앉았다. 첫 3월 모의고사를 치렀다.
변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신경 쓸 일이 줄었다. 고3이라서 인지, 아니면 암에 걸리고 한츰 힘이 빠진 아빠 인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것이 조용했다. 그는 손찌검을 자제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그는 엄마에게 많이 의지했다. 암환자가 된이후, 약간의 권력이 옮겨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이 일부 이양되었음을. 내 방문 밖에서 시스템의 작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지원방식을 정해야 했다.
정시와 수시, 점수로 가는 길과 미리 빠져나가는 길이 있었다. 고 1 때부터 반복한 방식이 있었다. 내용보다 구조를 보는 것. 우리 반 교실에는 총 43명이 앉아있다.
50%는 누워있었다.
30%는 책상 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꼬리빗으로, 빗고, 또 빗었다.
손톱을 다듬고, 손톱에 그림을 그렸다.
나머지 20%만 수업을 듣는다.
끝까지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늘 전체보다 분포를 읽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답을 찾았지만, 나는
살아남는 방법을 찾았다.
나는 문을 통과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다.
이런 반에서 일등은 목표가 아니었다.
전교 5등, 문과 3등 안에 무조건 들어야 했다. 지원은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가능성을 나누고, 내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을 계산했다. 가능성을 나누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정해야만 했다. 확률을 올리려면 수시를 지원해야 했다. 담임 선생님, 나, 아빠 방향이 달랐다. 선생님은 내가 상위 대학의 하위과를 바랐다. 국어국문, 독일어, 철학과와 같은 곳.
서연고서성, 한이외중경.
우리나라 10위 대학교의 줄임말, 이곳과 교육대학교 중에서 딱 두 곳만 지원하기로 했다. 버티려면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기집아이는 선생이 최고다. “
그렇게 말하던 아빠는, 내가 법학과를 말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래, 계집애는 결혼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교대 다니는 남자는 가난해. 못 사는 집 아들이나 초등학교 선생 지원하지. ”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답게 정확했다.
그가 생각한 안전과 내가 생각한 안전은 같지 않았다.
그에게 교대는 안전이었다. 나에게 안전은 아니었다.
일곱 살 기집아이는 늘 계산하고 있었다. 교대와 법학. 단순한 학교 선택이 아니었다. 교대는 나의 정체성을 부정함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방향만 계산해 왔다. 방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선생이 최고.”라는 그의 가치관에 걸맞게 자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법학과는 진로가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기준이었다.
교대는 살아남는 길이였고,
법학과는 나를 부정하지 않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대학교 교수를 대항할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을 계산하면 나침반은 여김 없이 교대를 가리켰다. 내 모든 성적과 카테고리별 가능성, 교대에 좀 더 승산이 있었다. 결국 나의 구조와 고3의 현실을 믹스해 지원했다. 내가 세운 좌표가 흔들렸다.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두 대학교 서류에 합격해 논술 시험을 보았다. 첫 번째 합격 통보는 교대였다. 엄마와 당일 새벽 첫차를 타고 5시간 걸려 면접을 보러 갔다. 책에서 보던 캠퍼스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우리 동네랑 큰 차이가 없었다. 역에서 내리면 작은 밥집과 가게들이 있고, 자그마한 학교가 있었다. 2:1 구술면접이었는데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하나의 질문이 기억난다. 우리나라 교육방식과 그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라.
내가 배우던 당시, 공교육은 달달 외우는 암기식이었다. 00에 대한 답은 A, 00에 대한 답은 B. 공식처럼 외워야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해외 사례나 논문, 해외 교육은 사고와 관점을 키우는 창의적인 수업이었다. 면접관이 되물었다. ”현실에서 힘들어요. 창의적인 수업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
나는 대답했다.
”창의적인 수업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칠판에 분필로 ‘파랑 + 빨강 = 보라.’ 공식으로 배웠어요.
저라면 물감을 쥐어줄 것 같습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의 물감을 짜주고, 흰 도화지에 각자 붓으로 섞어 보는 거죠. 노란색과 빨간색을 섞어보고,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어봅니다. 방향을 제시하고, 과정은 학생이 겪게 하며, 그 이후에 정리를 해주는 역할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면접관이 희미하게 웃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날 서울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교대는 합격했다. 며칠 뒤, S대학교 법학과 합격 소식을 받았다. 또 한 번 버스를 탔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2호선 지하철 역에 내렸다. 출구로 올라간 나. 눈이 똥그래졌다. 커다랬다. 가게도, 사람도, 길도 전부 다. 이쁜 옷가게, 문구, 카페도 가득 있었다. 캠퍼스는 고등학교 몇 배 크기였다. 마치 거인의 왕국에 도착한 어리숙한 모자를 쓴 난쟁이 같았다. 그 길 사이로, 키 큰 오빠 언니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지나갔다. 그때 다짐했다. 나는 여기다. 이름이 불리기 전 손바닥에 남아있던 온기가 쉽게 식지 않았다. 먼저 들어간 사람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오래 들었다. 닫히는 소리가 아니라, 기준이 바뀌는 소리 같았다.
312번 수험생, 들어오세요.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오래전,
작은 손으로 붙들고 있던 문고리가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높이에 손이 닿았다.
이번에는 돌아서지 않았다.
나는 문을 닫고 있는 아이였고,
지금은 문을 열기 위해 그 앞에 서 있었다.
이 문은 버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향해오던 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밀어 넣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서 잠깐 멈추어 서있었다.
이번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문고리는 차가웠고
오래 망설여 온 일은 마지막 순간에도 낯설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렸다.
끼익,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멈추기 위해 서 있는 문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서 있게 될 자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