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리님께 들은 말이다. 어떤 임원이 말하길 회장님이 해외에서 귀국하는데 왜 공항까지 마중가지 않느냐고 업무 중에 잔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퇴근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퇴근하기 전에 퇴근했다는 이유로 꾸중하고, 주말에 개인 업무를 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당장 고용노동부에 신고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대리님은 그 임원이 꼰대라고 했다. 푹 고여서 자신이 고인 물인지조차 모르는 꼰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이' 쓰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팀원과, 그것조차 '의미'라고 고집하는 임원의 생각 차이가 '꼰대'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된다.
방송국은 바로 이런 꼰대력과 젊음이 한데 뭉쳐있다. 경험과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줄 게 직급밖에 없어서'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장년층 임원들이 포진되어 있어 모든 시스템이 그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요즘은 서른만 되어도 꼰대, 꼰대 하는 판에 어르신들이라고 무작정 꼰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세상은 우리가 올드하고 꽉 막혔다고 하는 바로 그 어르신들로 인해 굴러가고, 심지어 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꼰대의 결말'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면 꼰대란 뭘까. 대리님이 말하는 것처럼 이기적이다 못해 기이한 사고를 가진 사람인 걸까?
꼰대는 늙은이를 지칭하는 말도, 사회적 지위를 조롱하는 말도 아니지만 딱 하나, 굳센 고집이 필요한 듯하다. 그러니 고집과 비례하는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꼰대라고 불리고 싶었을까. 그들이 수십 년 간 이루어낸 성과가 단어 하나로 빛을 잃게 되는 모습은 나라도 기함할 일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을 꼰대들. 꼰대는 선택에 의해 되는 건이 아닌, 어느새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앞선 대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며칠 전 겪은 일이 생각났다. 그날도 열심히 시청률을 뽑으면서 차트를 만들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못마땅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제대로 일을 하는 게 아니지." 핀잔 주기로 유명한 그 임원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A채널이나 B채널을 봐. 그쪽처럼 시청률을 올리지도 못하면서 데이터를 뽑아내는 게 무슨 소용이야? 쓸데없이."
PD로 나를 뽑아놓고서는 시청률 일을 시키고 있는 회사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울컥했다. 더군다나 그런 핀잔을 주는 임원들은 방송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사업가들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새로운 의견을 내면 묵살하고, 기계처럼 일하면 또 그런대로 뭐라 하는 곳에서 의욕이 생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럴듯한 프로젝트도 임원회의 하나로 뒤집히고, 부서의 얼굴받이이자 욕받이인 팀장들은 수당 없는 야근을 밥먹듯이 한다면, 그 안에서 누가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퇴직한다고 핀잔하기 전 자신들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는 객관적인 눈이, 용기 있는 입이, 바르게 듣는 귀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를 한심해하며 혀를 찬다.
말 그대로 존중이 없는 사회이다.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말도 아랫사람을 보살피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꼰대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들이 먼저 그런 존중 없는 사회를 보았을 것이다. 공항까지 회장 마중을 나가고 자녀 픽업을 시키고 상사 퇴근할 때까지 퇴근할 수 없는 사회를 먼저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물려준다. 그들의 손으로 발전시킨 현대사회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에 자신이 받았던 불합리만은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학습효과 혹은 보상심리라면 할 말이 없다. 꼰대라는 말은 그저 '그런' 세상을 사는 '그런' 사람들끼리의 자조로 끝날 것이다. 30년 뒤의 나는 무어라 불리고 있을까. 꼰대의 굴레는 우리 대에서 끊을 수 있을까. 꼰대, 과연 버려질 말일까 돼버릴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