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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nZ Nov 27. 2022

꿈을 깨고 날아오를 사람, 꿈에서 깨어 살아갈 사람

마지막 로스쿨 도전기 下

결과가 나오기로 한 날은, 조금 이상한 날이었다. 그날은 회사에서 일주일간 진행하는 특별생방송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상하반기 통틀어 나름 큰 행사였다. 입사 초에는 TV에 얼굴 한 번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 생방송에 출연하는 나를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뜬금없이 팀장님이 스튜디오 참관을 하게 해 주신 것이다. 나는 곧 나올 결과 발표로 마음이 떨려 눈앞의 생방송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초조하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대학원 사이트에서 발표가 당일 오후로 늦춰진다는 공고가 떴다. 작은 공모전도 아닌 무려 로스쿨 발표를 이런 식으로 미룰 수 있나 싶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마음을 비웠다. 그러기를 1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2년 전 꿈꾸던 생방송 자리에 서게 되었다.


작은 꿈이긴 했지만,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로스쿨 결과에 대한 걱정은 잊고 기쁨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좋아하는 찬양팀과 연예인들이 있는 무대였다. 방송국에 있으니 이런 날도 있구나. 거의 처음으로 방송국 득을 본 느낌이었다. 신나게 방송을 마치고 핸드폰을 보니 오후에 나온다는 1차 발표가 이미 나와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험번호를 눌렀다. 가군 결과를 확인하고, 나군을 확인했다.


1차가 나오기 전부터 늘 하던 기도가 있었다. '떨어질 거면, 애초에 떨어지게 해 주세요. 괜히 기대해서 면접까지 가다가 낙방하느니, 1차에 내동댕에 쳐주세요.'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대차게 1차에서 떨어져 버렸다. 너무 깔끔하게 떨어져서 기다린 게 허무할 정도였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한 일주일 시름시름 앓긴 했지만 금세 툭툭 털고 맛있는 밥집을 찾아다녔다. 과거 같았으면 이 결과 없는 과정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종래에는 나를 한심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덤덤함이 혹시 내가 너무 크게 좌절해서 아직까지 실감을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남의 시선을 그토록 신경 쓰던 나였는데, 로스쿨 탈락을 주위에 알리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 발표 전에 생방송을 즐기게 해 준 신에 감사할 마음이 생길 정도로 마음은 평온했다.


왜일까. 내가 직장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막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실패를 버틸 수 있었던 건가. 커뮤니티에 성적을 올려보니, 토익과 학점은 괜찮으니 반수 해서 LEET(법학적성시험) 점수만 올려보면 좋겠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딱히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을 보아하면 사실 내게 합격은 큰 의미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냥 시험을 준비하던 시간으로, 무언가를 도전하고 있다는 그 시간만으로 나는 위로받고 있다. 또한 그 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최선을 다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얻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스스로 깔끔히 단념한 것일 수도 있겠다.


꿈을 꿀 때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목표를 위해서 살아간다면, 목표까지 가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은 목표가 성취되지 않을 때 모두 의미 없는 시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며 산다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 시간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었으므로 가치가 있다.

누군가 시험공부를 하면서 뭐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기계가 아닌 것 같아서 좋았다고 말할 것이다. 회사에서 느끼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내가 멈춰있지 않은 것 같아서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성공할 거라서 좋은 삶이 아니라, 실패할지라도 좋은 삶.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로스쿨을 준비하며 꾸게 되었다.


원하는 일이 있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해보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성공할 거라서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분명히 당신에게는 득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 해보지 못해 아쉬울 수천 가지 항목 중 하나를 지우는 것이 얼마나 큰 성취인가. 내가 목표가 아닌 목적을 가진 사람이 된 것도, 늘 두려워하던 '실패하는 과정'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우연히 만난 하나의 도전 덕분이었다. 결국 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으며 해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 겨울 내가 꾼 로스쿨이라는 꿈에서 깼을 땐, 선선한 가을이었다. 방에 가만히 앉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자면 1년이 한순간에 지나간 것 같아 서운하다 못해 서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이 있다. 이제 깨어나야 할 꿈이라면 너무 서글퍼 말자. 그 무엇보다 빛나는 꿈이었으니 너무 아쉬워 말자. 꿈을 깨고 날아오를 사람도 있지만 꿈에서 깨어 살아갈 사람도 있으니, 너무 좌절치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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