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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상 Jun 25. 2024

오이디푸스 왕 후기

비극(悲劇)이란 말을 들으면 결말이 떠오른다. 절망하는 주인공,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명, 어떤 형태든 간에 결말은 머릿속을 빠져나와 현실에 현현(顯現)하며 생생해지는 것만 같다. 흐트러진 먼지처럼 지저분하나 극적인 감정도 동시에 피어오른다.

 나는 극적인 감정이나 현현하는 것 같은 생동감이 사람들의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극은 자극적이어서 인기가 많다. 자극적이기에 감정은 쉽게 고양되고 작중 장면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혹은 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요즘은 해피엔딩이 대세지만  흔히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 우리의 가슴이 메어지게 하고 관심을 들이밀게 하는 것들은 대게 고통, 핍박, 혼란 등의 내용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적인 것들에 공감한다. 인생은 행복으로만 점철될 수 없고 심지어 고통보다 소수이기에 사람들은 행복보다 고통의 기치에 끌리는 것이다. 즉 고통은 행복보다 더 일상적이고 지극히 존재한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자극적이어서 고통의 이야기인 비극(悲劇)도 자극적이고 이것이 그 자체의 인기 비결이 된다.


 물론 한 작품이 자극적이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극도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형식을 갖추고 전개가 매끄러워야 한다. 글로서의 가치인 미문(美文)도 있어 감정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작중 인물들은 매력적이고 서사는 치밀해야 한다. 대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처럼 말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고전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내용에서 느껴지는 애달픔, 고통, 비참함, 자극성들은 물론이고 시적인 문장들, 촘촘한 구성, 거기에서 이어지는 결말까지 그 자체로 비극의 극치라 평가받는다.

 앞서 나는 비극이란 말을 들으면 결말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고통 속에서 최후를 맞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고. 다만 결말이 잊히지 않는 작품이란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까지 최고여야 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결말이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자체의 비참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의 행복이, 인생이 어떻게 무너지고 스스로 자각하는지가 천천히 예술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을 넘어서는 이야기로서 완성품인 것이다.

 본 글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이 나에게 어떠한 감정의 싹을 트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고 작품 속의 고통과 고통적인 것들, 그리고 자극성에 대해 적겠다. 그리고 몇 가지의 미니 주제를 정해 감상의 살을 덧붙여 나가도록 하겠다.


줄거리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어느 날 양발이 꿰뚫린 채 묶여 버려진 아이를 양치기가 발견한다. 양치기는 그 아이를 폴뤼보스 왕에게 데려가고 왕은 그 아이를 양자로 들여 키운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산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어느 일행을 만난다. 일행과 오이디푸스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했고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 일행을 죽인다. 시간이 지나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를 구원한다. 그로 인해 테베의 과부 여왕이었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과 결혼한 여자가 본인의 친모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시간이 지나 테베의 백성들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이디푸스, 마침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스로의 수치를 이기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그리고 테베를 떠난다.

 여기까지가 흔히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이다. 다만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시작은 이미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로부터 시작한다. 즉 자신의 운명을 이룩해 낸 상태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처남인 '크레온'을 통해 왕국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신탁을 듣고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신탁은 선대 왕 '라이보스'를 죽인 자를 찾아 추방하거나 살해하라는 내용이었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그대가 찾는 자가 바로 오이디푸스 본인'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를 단박에 부정하고 처남 '크레온'이 자신을 쫓아내고 왕이 되기 위한 계략이라고 치부한다. 그 후 아내인 이오카스테와 대화를 통해 과거를 맞춰나가는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를 접견한다. '사자'는 '폴뤼보스'가 죽었으니 다음 왕으로 오이디푸스는 추대한다는 내용을 전달한다. 여기서 자신이 친부를 죽인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이 틀렸다고 생각해 오이디푸스는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사자'는 오이디푸스가 '폴뤼보스'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자'가 오이디푸스를 주워 '폴뤼보스'왕에게 전달해 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오이디푸스'를 건네준 자가 있다는 다른 '양치기'가 있다는 사실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에게 '라이보스'왕이 죽었을 때 생존했던 그 하인이 맞냐고 묻는다. 사태를 직감한 이오카스테는 더 이상 더 이상 사건을 파헤치지 말라 부탁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하인을 불러드린다. 하인은 '라이오스'를 죽인 자가 오이디푸스가 맞다고 진술한다. 진실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절규한다. 결국 자살한 이오카스테의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떠나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고통>

 오이디푸스의 고통의 특징은 그것이 쓰나미처럼 한 순간에 밀려든다는 것이고 '무지'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원인이 되는 이유들은 지극히 자극적이다. 왕국을 덮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운명으로서 실현된다. 사실 이미 테베의 왕이 되고 친모인 이오카스테랑 결혼을 한 순간부터 운명을 이룩해 낸 것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즉 오이디푸스는 '시간폭탄'을 들고 살아왔던 것이다. '시간폭탄'을 분리하자면 그 내용은 고통을 실현하는 운명이고 오이디푸스의 '무지'는 폭탄의 도화선이었다. '무지'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심지를 태우는 불이 됐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바로 진실을 알고 실현된 운명을 목도한 그 찰나에 고통은 주체할 수 없게 넘실거렸다. 실제 폭탄을 맞고 죽은 시체처럼 운명을 맞은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끔찍했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것으로 형상화 됐지만 친족 살해, 근친, 막장이 된 가족 관계 등의 고통은 두 눈이 찔린 형체를 넘어설 것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재앙을 능가하는 재앙인 것이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진범으로 밝혀진 사건의 주동자에게 신들의 이름을 빌려 엄청난 대가를 약속했었다. 은신처를 제공해서는 안 되고 같이 기도를 해서도 안 되며 정화의식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그 자를 쫓아내야 한다. 심지어는 "만일 내가 알고도 그자를 집 안의 화롯가에 받아들인다면, 방금 그자들에게 퍼부은 것과 같은 저주가 내게도 실현되기를!"라고까지 말했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과거의 언행을 떠올린 순간 그 고통은 배가 되지 않았을까. 오이디푸스의 최후는 자기 예언적이다. 그는 자신이 한 말들대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채 본인이 했던 말들의 실현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테베를 구한 영웅으로서, 나라의 왕으로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것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이디푸스 개인을 버리는 것에 가깝다.  스스로도 자신을 부정하고 더 큰 고통을 야기하는 행위라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야말로 운명에 갇힌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고통의 변주를 막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영웅적인 면모와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처음 공개됐다고 치자. 극도록 자극적인 소재에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 불행 포르노나 혹은 고문 포르노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이디푸스 왕은 자극적이다. 즉 그가 받게 되는 고통은,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는 자극적이다. 작중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도 시대를 초월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극적인 요소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호불호를 일으킨다. 혹자가 "비극인데 자극적인 소재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반문할 수 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자극적이라고만 해서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애달픔, 슬픔, 고통들을 표현하는 자극적인 요소를 작품에 잘 녹아내려 서사적 완성도를 높였다. 단순히 자극적이기만 해서 고통 표현을 잘한 작품이 아닌 것이다. 고통은 공연히 자극성과 연결되기에 그 정도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이 서사적인 완성도와 운명의 애처로움에 집중해야지 고통의 소재의 자극성에 대해 몰두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왕>은 단 하나의 요소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비극으로서의 고통과 자극성에만 묶이지 않고 대사, 등장인물, 서사 등 이야기로서의 매력적인 작품 전반에 흐른다. 이것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일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으로서의 고통과 자극성뿐만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도 높인 뛰어난 작품이다.


<운명과 무지, 그리고 신>

오이디푸스의 삶은 운명 한 마디로 정리될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게 된다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그들은 친부가 아니었다. 남남이라 생각했던 자가 친부였고 그룰 죽였다. 역시 처음 보는 여인이라 알아 아내로 맞이한 여자가 그의 친모였다.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운명의 특징이 나타난다. 내가 생각하는 운명의 특징은 대체로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당사자가 알고 있는 운명이다. 이것은 무엇 무엇으로 살아가야 한다 거나, 처음에 부정하지 않고 운명에 발현됐을 때 순탄히 순응하게 되는 운명이다. 두 번째는 당사자가 모르거나 도망치고 부정하는 운명이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첫 번째에 가깝지만 두 성격이 섞여 있는 느낌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받는다. 예언은 신들이 말한 것으로 대게 맞아떨어진다. 특히 고전 작품에서 예언은 명실상부 그 효과를 발휘한다. 예언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살 것이 정해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양부모를 피해 달아난다. 그러나 자신의 친부모를 만나 예언은 서서히 진행된다. 당연히 오이디푸스는 이를 알지 못한다. 자신에게 내려져서 알고 있었던 운명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역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테이레시아스의 "범인은 너'를 부정하며 이오카스테와의 대화에서 안도한다. 그러나 아내와의 대화에서 찝찝한 점이 발견되자 불안해한다. '라이보스'를 습격한 것이 몇 명인지에 집중하고 사건이 더 진행되자 아내가 자신의 출생을 부끄러워할까 봐 못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자신의 착각이자 무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이렇게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혼합되어 있는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지 않을까 싶다. 주목할 점은 오이디푸스가 종국에 운명을 대하는 태도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이 그대로 진행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 극도로 잔인한 운명이지만 순응하는 것이다.


    "(중략..)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1526행 이하


이 구절을 듣고 운명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나의 대답은 늘 진부하다.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라고."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 해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이오카스테가 말한 것처럼 되는 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도중에 그만뒀다면 추악한 진실은 존재하지만 삶이 무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운명보다는 작디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보살피며 살아가다 보면 삶의 종말 전에는 행복함을 기리지 말라는 크레온의 말도 그 색이 바래지지 않을까 싶다.

 

 오이디푸스는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작게는 가까이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많게는 자신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졌다.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나는 것, 이것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도 있지만 파국에 이르는 운명을 맞은 자가 그 운명에 걸맞은 삶의 위치로 내려간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알지 못했다면 책임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명예가 중요했던 시기이니 그럴 확률은 낮았을 것이다. 다만 신들을 비난하고 어찌 이러한 운명을 줬다고 비난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몰랐다고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무지는 개인의 삶에서부터 역사의 범죄까지 결과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개인과의 관계에서나 끔찍한 범죄까지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몰랐다, 그러니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가 모든 것을 막아주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책임은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기 때문이다. 스며드는 것은 버릴 수 없다. 몰랐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운명과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겠다.

 그리스 비극인 만큼 신을 빼먹을 수는 없다. 사실 작중에 나오는 운명은 신이 정해준 것이나 진배없이 느껴진다. 신들도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고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신들을 초월한 또 다른 섭리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신들은 너무도 잔인하다. 나약한 인간 앞에 신은 그저 방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중 무수히 나오는 신들에 대한 찬사, 기도, 한탄 등은 무색하다. 내가 본 오이디푸스 왕은 그저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허나 운명이라는 것을 신들이 정해준 것이라 생각하는 그 시대의 개인들에게 이토록 잔인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내린 운명, 죄악으로서의 비극의 고통과 자극성을 더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나는 알고 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현대의 인간은 그것에 무덤덤하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해 봤자 힘이 들고 신이라는 것은 개인의 믿음에 따라 궁색함과 친절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달랐을 것이다. 비록 공연장 위의 연기로 보이는 그 시대에도 비극은 신들의 무서움과 운명의 한탄함을 되새기는 용도로 성행했을 것이 분명하다. 즉 신이라는 존재는 고통과 자극성을 높여 비참함을 고양시키며 비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과거에는 불확실한 공포였겠지만 현대인인 나에게는 작품을 감상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됐다. ‘신’은 묘한 매력을 주는 <오이디푸스 왕>의 또 하나의 즐길 거리로 작용한다.


<오이디푸스의 자기 인정>

비극이란 말을 들으면 결말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결말이란 작품의 전체가 조화되어야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고도 덧붙였다. 치밀한 구성으로 도달한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비장함을,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는 모습을 숭고함을 가슴에 칠하는 것만 같다. 앞서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지'에 대해 말했다. 오이디푸스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이나 결과에 대해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웠다. 사소한 일부터 심각한 악까지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결과를 회피하려는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오이디푸스는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영웅적인 면모를 느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지'로 인해 탄생한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게도 요구되는 일이다. 인간은 행위와 결과의 굴레에서 책임이라는 짐을 진다.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책임'이라는 것은 개인화가 고도로 진행된 오늘날에 더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관계가 다양해진 작금의 시대에 사소함에서 중요함까지 '책임'이라는 것은 도처에 더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언으로 드러나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너는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할 것이다"이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책임과는 거리를 두고 계속 살아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테베의 역병을 극복하지 못해 비참한 말년을 보내겠지만 장님이 되어 방랑하는 삶은 살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옆에 있었을 것이고 견딜 수 없는 진실은 미문으로 남았을 것이다.

  핵심은 오이디푸스는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알게 되었을 때의 오이디푸스의 반응은 비극의 백미가 된다. 비극이 되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알아야 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고 테베를 떠나는 것으로 씻을 수 없는 불결함과 알지도 못했던 원죄에 책임을 진다.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한 결과에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즉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갓난아기로 죽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 속에서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한 결과에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기 인정과 연결된다. 

 요즘은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긍정적 사고와 태도를 강조한다. 그래야 회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선의의 합리화이고 좋게 말하면 자기 회복을 위한 일종의 사고 재설정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자세는 필수이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합리화가 심해지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일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문제에게까지 연결된다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 해결하는 어렵지만 쉬운 방법은 모두가 알듯이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들의 지나친 잔인함, 무지, 왕의 위치라는 변명거리를 내던지고 오이디푸스는 선언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신들이 정해준 운명이라는 굴레에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장님이 됐다.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 왜 그랬냐 하면, 내가 눈을 뜨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소? 앞을 보더라도 아무런 즐거움이 없을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 왕] 1330~1335행, 소포클레스, 강대진 역



 역병의 원인이 된 본인이 떠나므로 왕으로서의 책임을 진다. 처남인 크레온에게 자신의 딸들을 부탁하며 아버지이자 남매로서의 책임을 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에 대한 한탄과 모든 순간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며 장님이 된다. 이러한 모습을 나는 자신의 삶과 연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임과 인정은 하나의 굴레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자는 책임을 피한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만이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렇게 해  스스로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모든 것이 어두워진 순간에도 끌고 가는 것이다. 혹자는 신들의 장난인 운명 앞에 이렇게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 자체가 미약한 인간의 한계이고 운명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 자기 인정이라는 것은 신들에 비해 한심한 존재인 인간이 드러내는 발악으로 비극 작품의 최대의 비참함이자 절정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비극의 비참함을 찾아서 올라가다 보면 그 최고의 위치에는 나약함을 인정하는 인간이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이디푸스의 자기 인정, 그 자체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누군가에는 나약함의 발로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숭고한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결과가 어떠하든 책임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인간은 인간적일 때가 숭고한 것이다.

 처절한 삶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가장 불쌍한 인간이 된 시점에서 그는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책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참된 인간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이디푸스가 처한 상황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체험과 사고실험의 한 예로 나는 그 교훈을 받아들였다. 오이디푸스는 치열한 자기 이해와 타인에 대한 소중함 혹은 자신에 대한 인정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할 일을 행한 것이다, 나는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가장 인간적인 영웅 오이디푸스"라고.





맺음말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일단 원전 '오이디푸스 왕'은 이미 테베의 왕이 된 모습으로 나를 반겨줬다. 읽기 전에는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삶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삶의 결말 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의 다른 이야기들도 궁금해졌다. '고전'이라는 것은 감동을 줄 뿐 만 아니라 다른 책을 읽는 원동력까지 주는 것들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절실히 실현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나의 시간에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펼쳐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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