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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팥지혜 Oct 02. 2023

봄이 걸은 쪽의 밤

산 모퉁이로 사라진 그림자


  

남쪽의 더 남쪽이라 해도 시골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낮은 산들이 미로처럼 늘어진 이곳에 한 번 바람이 갇히면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탁음을 내며 떠돈다. 그 바람 소리에 이곳을 찾는 외지인은 종종 겁을 먹는다. 바로 윗마을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유골함과 봉분이 들어선 것이 무섬증에 한몫을 했다.

  

밤늦게는 오고 가는 이도 뜸하고 선뜻 마을로 들어서려는 택시도 없다. 겁 없는 몇몇만 가로등 별로 없는 거리를 휘청거리며 걸을 뿐, 이 마을 토박이들도 한 밤 중엔 외출을 꺼린다. 많은 젊은이가 떠나고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노인이 대부분이라 더 그렇다. 할 일이라고는 쳇바퀴 구르듯 평생 비슷한 일만 해온 터라 일상이 슴슴한 그들이다. 이런 별일 없는 곳에 그는 몇 해 전 겨울 이사를 왔다.

  

키는 백육십쯤 되었고 대걸레 자루처럼 말라선 하루에 먹는 술만 대여섯 병은 되었다. 어른들 말을 흘려 듣기론 내 또래의 딸을 두었다는데, 일찍이 아내와 갈라서고 시골 빈 집에 홀로 들어와 돈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가는 뜨내기가 더러 있는 마을이라 한 사람 보태졌다 해서 마을이 수런스럽진 않다. 그러나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시비가 붙은 윗마을 사람에게 한 밤 중 낫을 들고 설친 후엔 그에 대한 마을 어른들 경계심이 한층 강해졌다. 토박이도 아닌 그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느닷없는 짓을 한다며 오히려 그를 얕잡아 보았다. 그가 강하게 행동할수록 그랬다. 한 밤 중에 일어난 낫 사건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더 홀쭉해져 나타난 그는 처음의 기세와 달리 풀 죽어 보였다.

  

그는 내 친정집 식당에서 자주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 그가 식당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거름 냄새가 따라왔다. 계산대의 손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잔돈을 받아 돌아갔다. 맥주 한 병을 달라며 식탁에 앉는 그에게 맥주와 안주를 내어주던 나 역시 할 일을 끝낸 후엔 잰걸음으로 물러서 참고 있던 숨을 급하게 내쉬어야 했다.

  

여기 오는 손님 절반이 흙투성이 작업자들이었으니 몰골 험한 건 그렇다 쳐도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돌아야 할 한 복판에 썩은 거름 냄새를 풍기는 그가 마뜩잖을 리 없었다.

  

그는 식탁에 앉아 식당 안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 몇 마디에 첨삭을 덧붙이기도 했다. 어쩔 땐 근처에서 일하다 목이나 축일 겸 찾아온 이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의 그 눈은 비로소 겨울밤에 작은 모닥불씨 한 점을 되살린 것처럼 은은하게 일렁였다. 그는 호응에 인색하지 않았고 가끔 면박이 돌아와도 입술을 실쭉이다 말았다. 그리곤 겨우 얻은 말동무가 떠나갈까 서둘러 술 한 병을 더 외상으로 꿨다. 상대의 빈 잔에 꽉꽉 채우며 몇 분씩을 더 벌었다.

  

모두가 일 하러 떠난 자리에서 그는 한참을 앉아있다 빈 손으로 나갔다. 걷는 쪽에 집이 있다는 데 식당에서 그와 술잔을 기울이던 모두 그가 사는 집의 정확한 위치를 알진 못했다. 심지어 그의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었다. 몇 년간 말을 섞었으나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던 까닭이다.

  

몇 년째 비슷한 비둘기 색 점퍼와 색이 바랜 비니와 밑단이 헌 펑퍼짐한 바지, 그리고 중고로 얻어 신은 듯한 작업용 운동화까지. 그가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이 그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따로따로 떼어내 살펴보면 한 벌씩의 옷인데도 막연히 그를 떠올릴 때엔 하나의 덩어리로 그려지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내게 그는 꾸깃하고 끝이 너덜너덜한 알맹이 부실한 보따리 같은 이미지다.

  

마냥 그를 내켜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는 종종 우리를 도와주었다. 손님들이 먹고 간 그릇과 솥단지를 잔뜩 얹은 쟁반을 불평 없이 들고 가서는 또다시 돌아와 몇 번이나 더 쟁반을 이고 날랐다. 작은 체구에 용케 힘을 쓰는 게 보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실쭉 웃으며 먹다 만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는 했다.

  

알코올과 거름, 여러 잡내를 풀풀 풍기며 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한 번은 오래 바라봤던 적이 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쉴 겸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바깥 와상에 앉아 있을 때 넋 놓고 있던 시선의 방향이 그가 걸어가는 쪽과 우연히 같았기 때문이다.

  

점퍼 속에 가려진 몸이 휘청휘청 멀어졌다. 한 낮인데도 꼭 그의 주변만 초저녁 같았다. 해가 들지 않는 그림자 속을 걸어가는 그는 멈추지도 뒤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곳에 이사와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것. 그것은 걸음의 단호함이었다. 지난 그의 삶도 그의 걸음을 닮았던 모양이다. 여러 단호한 선택이 만들어낸 운 나쁜 필연이 결국 피붙이 하나 없는 이곳까지 그를 떠민 거다. 그 자신에겐 뿌리내리기에 춥고 딱딱한 겨울 땅 같은 타지에서 그는 몇 년을 더 눈에 들어간 모래알 같은 존재로 살았다.

  

"그 사람이 거기에 갔었나요?"

"아니요, 설 지나고선 통 얼굴을 못 보았네요."

  

어느 날 그의 일가라는 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보를 전한 그 사람에게 대략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술에 취해 발을 헛디딘 모양이라고. 넘어진 곳이 하필 그 혼자 살고 있던 집이었다고. 머리를 부딪혔지만 도움 줄 사람이 없어 쌀쌀한 겨울밤 중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그렇게…….

  

……

………….

  

남쪽의 더 남쪽, 낮은 산이 미로처럼 얽힌 작은 시골에선 봄이 되기 전 많은 것이 얼어 죽는다.

  

나뭇가지에서 추락한 새와 고양이와 작은 설치류와 홀로 살던 사람까지. 한풍을 미로처럼 가둔 여기저기서 밤 중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린다.

  

올해도 봄이 오기 전 많은 것들이 2월에서 멈춘다. 그래서인지 봄은 늘 걸음소리조차 없이 다가온다. 자신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보가 있었는지 알고 있단 듯, 어느 날 시선을 준 쪽에 느닷없이 서 있다. 휑하던 나뭇가지에 매화 봉오리가 올라와 있고 겨울 내내 탁한 갈빛으로 뻣뻣하던 줄기가 연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문득, 정말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봄이 소리 없이 걸은 쪽을 따라 걷던 나는 한낮을 마치 겨울 초저녁 걷듯 휘청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여기 오기까지 그가 걸은 길이 뒤늦게 궁금하다. 하지만 대답해줄 이는 없고 걸어가는 뒷모습만 길 여기저기에 선하다.

  

그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소리 없이 걸어온 봄이었을 것이다. 향기롭게 흔들리다 느닷없이 오므라들고 뻣뻣해져 결국엔 꺾여 던져진 한 철 꽃이었을지 모른다. 뾰족한 가지처럼 마르고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그는 자신을 궁금히 여기지 않는 빈 집에서 혼자 시들었다.

  

오늘도 죽은 이들을 향해 많은 이가 윗마을로 향했다. 술 한 잔 기울여야겠다 마음먹은 몇이 우리 식당에서 소주를 사갔다. 덜렁 그것만 들고 가려기에 냉장고에 있던 작은 사과 한 알을 곁들여 주었다. 고맙다 고개를 숙인 이가 서둘러 떠났다. 누가 또 오나 바라본 입구에 지나가는 사람 아무도 없는 길이 있다. 작고 앙상한 이가 큰 보폭으로 걸어가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돌아보는 일 없이 걸어가더니 낮은 산 모퉁이를 홱 돌아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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