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봅니다
모든 벽은 문이다.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벽이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앞에 멈춰 서라는 뜻으로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한계라는 벽을 만나게 되지요. 이런 위기의 순간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나요? 어떤 이는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나 스승의 조언이나 지혜를 구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심리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나 성격장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상담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요즈음은 가족 간이나 대인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효율적인 자녀양육을 위해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자 상담을 한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삶의 소용돌이에서 심리상담사인 저는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글쓰기라는 새로운 대상을 만나고 보니 글을 쓰는 과정이 저에게 익숙한 상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상담의 단계는 일반적으로 시작, 준비. 작업. 종결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만남인 시작단계는 오리엔테이션 성향을 띠게 되는데 상담전반에 대한 안내를 합니다. 상담횟수나 규준, 그리고 내담자의 호소문제나 원함을 해결하기 위해 상담의 목표를 설정하게 됩니다. 자녀양육 코칭을 원하는지, 대인관계기술 향상이 목적인지에 따라 상담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상담의 주제가 무엇이든지간에 상담의 목적은 ‘행동의 변화’입니다.
내담자는 속상하고 억울하고 불안한 마음을 살얼음판을 걷듯 조금씩 내비칩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자하는 간절한 열망이 마음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냅니다. 자연스럽게 상담사와 신뢰감을 형성하는 준비단계로 이어집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서는 의심과 저항, 그리고 갈등을 넘어서야 하는 법이지요.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상담사에게 어디까지 오픈할 것인가는 두 사람사이의 신뢰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상담사가 공감적 경청을 하며 전적으로 자기를 지지해준다는 안전감이 있을 때 내담자는 상담사에게 심리적 의존을 하게 되며 상담은 순항을 하게 됩니다.
이후 몇 주간은 작업단계로 내담자가 상담을 오게 된 목적에 맞는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내담자가 자신의 원함과 욕구를 온전히 개방하는 가운데 억압된 감정의 정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상처가 난 자리를 아프지 않게 호호 불어주는 공감과 경청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비효과적인 행동패턴이나 잘못된 생각들을 맞닥뜨리는 수술을 하는 것 같은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내담자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콤플렉스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상담자를 공격하거나 상담을 회피하기도 합니다. 당사자가 이러한 심리적 벽을 만날 때 상담사가 일관되게 자기를 지지해주는 힘을 의지하여 그는 서서히 자신의 벽에서 문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을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고 자신의 원함과 일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마지막 종결단계는 마치 엄마에게 의존하던 아이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것과 비슷합니다. 상담과정에서 상담자가 준 격려를 힘입어 내담자가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암초들을 스스로 헤쳐나가리라는 의지를 안고 상담사로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상담과정에 빗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내적치유를 위한 글이든 경험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든. 자기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이란 무형의 것들이 문자로 생산되는 과정입니다.
글쓰기의 단계도 상담과 같이 4단계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작단계에서는 먼저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에 대한 글의 주제와 목차를 만들고, 한 가지 주제를 얼마의 분량으로 쓸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지요. 글 쓰는 이가 글을 읽을 독자와 신뢰감을 형성하는 준비단계에서는 상담이 그러하듯 상당한 저항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머릿속의 생각과 느낌을 어느 수위만큼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꺼냈다 집어넣었다를 반복하며 자기와 실랑이를 벌입니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고 평가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예상과 다르게 글을 쓰는 과정이 녹록치 않음을 경험하며 또 다른 나만의 벽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써내려가던 메모지를 구겼다 폈다, 애써 타이핑한 문서를 지웠다 다시 썼다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써야 할 이유와 포기하고픈 이유가 밀당을 벌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왜 쓰고자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스레 작업 단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 줄 한 줄이 문단으로 이어지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보기도하고 글을 쓰기 전에는 감춰져있던 내안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과 정보들을 발견합니다. 점차 생각과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고 나만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재료로 맛깔난 요리를 만들어 갑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환희도 한 올 한 올 엮어 내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갑니다. 자신 앞에 버티고 있던 벽에서 문을 발견한 셈입니다. 초고가 완성되었습니다. 쓴 글을 수정하고 퇴고하는 종결단계를 거쳐 드디어 나의 글은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렇듯 상담과 글쓰기는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두 과정 모두 힘든 터널 같은 한계상황을 통과해서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벽을 만나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작한 글쓰기에서 새로운 벽을 만나 고군분투하는 동안 원래의 벽에서는 한걸음 물러서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 벽을 피하려하지도, 부수려하지도 않고 언젠가 발견할 문을 기대하며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나를 만나 일상에서 채 나누지 못한 담소를 나눕니다. 나는 지금도 변화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