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꽃들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 얼룩, 아니 빨갛고 하얀 줄무늬다. 모든 것은 줄무늬가 된다. 곡물 밭은 부스스하게 마구 자라난 노란색 털이며, 알팔파 밭은 초록색 머리칼을 길게 땋은 것 같다. 가끔씩 어떤 그림자, 형태, 허깨비가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창문 뒤로 사라진다. (철도여행의 역사, 볼프강 쉬벨부쉬, 궁리, 2014)
장발장, 노트르담의 꼽추, 레미제라블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 이 글의 처음을 장식한 내용은 빅토르 위고가 기차를 타고 남긴 소감이다.
자, 여기서 문제! 당시 위고가 탔던 기차는 시속 몇 km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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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km, 그 기차는 스쿨존을 통과하면 과속 단속 카메라에 걸리지 않을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위고는 자기 눈앞의 시골 풍경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처럼 구체성을 상실하고 허깨비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시간도, 속도도 상대적이다.
얼마 전 과학 잡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흠. 나 역시 하루가 손가락 사이를 흘러나가는 바람처럼 쥐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걷는다. 걸으면 내 안에 멈춰있던 내가 다시 유연해지고 세상의 존재들이 나에게 스며들면서 생기가 돈다.
우리는 필수적으로 걸어야만 하는 시대에 살지 않는다. 원시 시대 살기 위해서 걷고 이동해야 했던 DNA는 남아있겠으나, 가까운 거리도 QR(정보 그림)을 찍고 소형 이동기를 어디에서나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이다. 편리함은 그렇게 우리 생활에서 걷기를 삭제해 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존재를 위해 '걷기'를 선택한 현인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루소다. 장 자크 루소는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어떻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수줍음이 많고 질병에 자주 걸렸던 그는 사회적인 만남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루소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자신의 철학에 걸맞게 마차여행조차 거부하고 온 유럽을 걸었다.
예전에 걷지 않던 길을 걷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 인상적인 분들이 세 분 있다. 두 명은 러너임이 분명해 보인다. 캡틴 아메리카가 울고 갈 만한 레깅스형 러너복장으로 달리는 남성분을 며칠 사이 계속 스쳐갔다. 한 번도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뒷머리에는 골전도 이어폰의 헤드라인이 걸쳐져 있다. 문득 왼쪽 팔을 구부려 들어 올리며 시간을 체크하는 모습이 눈에 확 박힌다. 와, 나는 걷기도 이제 아장아장인데.
또 한 분은 여성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커다란 나*키 로고가 새겨진 화이트 스웨트 커버에 블랙 쇼트팬츠를 입고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양말을 신었다.러너용 양말이 따로 있나? 그녀 역시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세 번째 스쳐 지나간 날, 아! 기억났다. 아이와 배드민턴 치던 그 운동장에서, 펜스를 따라 묵묵히 수십 바퀴를 돌던 그분이구나!! 밤에 봤을 때 학생인 줄 알았는데 러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뭔가 성숙해 보인다.
다른 한 분은 어르신이시다. 90은 족히 되어 보이시는 그분은 차림새가 아주 맵시 있으시다. 보폭은 내디딘 발과 지탱하는 발 사이가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깝다. 지팡이를 짚고 계시지만 리듬감 있게 걸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내게 먼저 인사하신다. 안녕하세요. 나도 정중하게 인사드린다. 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눈 후 정자 쪽으로 이동하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앉아계신다.
아이, 형님, 저리로 가셨어.
오전이라 서리 내려서 미끄러울 텐데. 젊은 우리도 넘어져.
그러게 말이야.
사알짝 고개를 돌려보니, 그래, 젊은 어르신들 맞다. 요즘은 60이면 신중년이라 하지 않는가. 어르신들의 서로를 걱정하는 대화가 듣기 좋았다. 운동은 뇌에 직접적인 자극이 된다. 오죽하면 <운동화를 신은 뇌>라는 책이 있을까. 나의 아버지도 저렇게 좀 걸으시면 좋으련만 소파에 파묻혀 움직이지를 않으시니 가뜩이나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끈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겠다.
아빠와 함께 걸었던 최초의 걸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내 삶의 모든 순간 내가 딛는 발을 바라본 아빠가 계셨음을 안다. 하늘이 맑기도 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모시고 나와야겠구나.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있다 해도 몇 개의 새털이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저 지금의 그 걸음으로 우리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