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 아래에 있는 어수선하지만 편안한 작은 슈퍼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등산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절에 가는 아저씨, 아줌마들도 이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가끔 현장학습 같은 걸 온 학생들도 왔다. 연수 엄마는 장사수완이 좋은 편이었다. 연수 엄마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사서가라고 재촉할 때면 연수는 볼이 붉어졌다. 연수 엄마는 "위에 올라가면 물 한 통 가격이 삼천 원인데, 여기서 사가야지."라던가 "지난주에는 절에 올라가다가 젊은 남자가 마 힘들어서 픽 쓰러졌다데."라며 초콜릿을 내밀었다. 은행나무 슈퍼도 아무렴 관광지에 있다 보니 그다지 가격이 싸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의 지갑은 연수엄마의 설득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등산객들은 단풍구경 위해 먼 발걸음을 했다. 연수는 그들을 보았다. 언젠가부터는 은행에서 나는 독한 냄새에 연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알록달록한 나무들은 그 자태만으로 숨이 막혔지만 바닥에 떨어진 알알이 은행을 밟기라도 할 새면 정말로 코를 찌르는 냄새가 하루종일 연수를 따라다녔다. 연수는 냄새나는 신발의 바닥을 보도블록에 박박 닦았다. 연수의 눈에 담장 너머 절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비쳤다.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 커다랬다. 연수의 할머니의 할머니도 나무를 봤고 연수의 손녀의 손녀도 그 자리에 선 나무를 볼 것 같았다. 포근했던 공기가 가을의 서늘함을 품에 안았다. 하늘은 한 번도 같은 색이 아니었고 짙어지는 누런 나뭇잎의 빛깔도 내내 가을에 익어갔다.
가끔씩 유명하다는 절의 중들이 은행나무 슈퍼에 들렸다. 연수 엄마는 이번에 호박이 많이 열렸다거나 가지가 많이 났다거나 고춧가루가 잘됐다는 말을 전하며 중들에게 그것들을 선물했다. 연수는 사실 스님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님들이 다녀가면 연수는 늘 삐딱하게 "왜 저 사람들에게 우리 걸 그냥 주는 거야?"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푸근했던 인상의 연수 엄마도 절에 그려진 무서운 장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연수를 보며 "말 안 들으면 머리 박박 깎아서 너도 절에 보낸다."라며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연수의 머릿속에는 까까머리의 동자승들이 떠올랐다. 연수는 "으으.." 하며 싫은 티를 팍팍냈다.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연수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강아지 같은 게 그려진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슈퍼에 딸린 작은 방에 들어가면 왠지 답답하고 숙제를 해야 하니 그것도 싫은 모양이었다. 연수는 슈퍼에 있는 엄마에게 인사하고는 후다닥 나와서 평상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칙칙한 옷을 입은 땡중 하나가 연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연수의 머리 위에 나뭇잎이 묻었나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깜짝 놀란 연수가 머리칼을 탈탈 털었다. 하지만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연수를 지켜보던 땡중은 이내 우악스럽게 연수의 머리통을 잡아 뒤적였다. 그는 연수의 정수리 쪽을 두어 번 손끝으로 긁더니 어허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연수가 왠지 모르게 얼어붙어서 그 작은 머리통을 고요히 내어주고 있었다.
밖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자 연수 엄마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중은 연수 엄마를 보더니 연수의 머리통에서 손을 떼고는 가슴 앞에 합장을 하였다. 연수 엄마도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수도 엄마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연수 엄마의 시선이 빠르게 연수를 훑었다. 연수는 콧김을 뿜으며 억울하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았다. 연수의 눈썹이 팔자를 그렸다.
”아이의 머리통이 조금 열려있습니다.” 중이 입을 뗐다.
“머리가? 왜요? “ 연수 엄마가 따지듯 물었다. 연수는 자기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고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인 모양을 느끼려 머리를 만져댔다. 연수의 손끝이 기름져갔다.
중은 연수의 엄마와 연수를 번갈아 보며 ”아이가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니 휙 뒤돌아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연수 엄마는 "허. 기가차네"라며 어이없어했다. 중이 멀어지는 걸 보더니 연수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못 된 중놈이.. “ 연수 엄마가 연수를 껴안았다.
"엄마. 절에서 나온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된다며" 연수가 말했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스님을 못된 중놈이라고 말했다는 게 연수에게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연수가 흐느끼더니 금방 울음이 꺼억꺼 숨넘어가게 커졌다. 연수 엄마가 ”에휴. 울지 마라 아가야. 울지 마라. “라는 말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