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몽상을 하다 떠오른 문장 하나. 지난 시간 속 만남들을 기억하다 떠오른 문장 하나. 나는 궁금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왜 날 만났을까. 당신의 시간과 품이 드는 그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언제부터인가 사람과의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자책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왜 그때 그 말을 했을까. 내가 왜 그렇게 했지. 다음에 볼 땐 그러지 말아야지. 그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지만, 다음번 만남 끝에서 돌아오는 건 허공에 나뒹구는 이불과 혼잣말로 내뱉는 된소리다. (혼자 사는 사람의 특권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마음 한편에 미안한 감정을 안은 채 만나기도 한다. 물론 즐거운 마음으로 마주하지만, 결국 자책으로 걸어올 때도 있다.
어느새 사람 만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약속을 잡을 때 괜한 자격지심에 머뭇거려지거나,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해 이야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했던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 내가 행해야 할 '의무'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한 사람은 말한다. '네가 사람 만나는 일에 지친 것 아니냐.' 일리 있는 말이다. 카카오톡 대화를 봐도, 그제 만났던 절친한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혹여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상대방에 쏟는 정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하물며 엄마와의 대화도 그렇다. 3년 전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 속에 나는, 차 안에서 엄마와 많은 말을 나눴다고 써놨다. 지난 추석 때 엄마와 함께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요즘 내가 엄마에게 많은 말을 나누지 않다는 것이 퍽 느껴진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짧은 만남이더라도 적정한 수준의 수고로움으로 사람을 대한다. 만남 전후로 다가오는 감정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고, 경과에 따라 피곤함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사람들은 왜 나는 만나는 것일까. 사람을 이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유려한 말솜씨를 가진 것도 아닌 나를, 사람들은 왜 만나는 것일까. 그래서, 나를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은 왜 날 만나는지에 대해. 만나서든, 전화로든, 카카오톡으로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통해.
"어쩌면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