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수보다 어린 사수
네가 잘못 가르친 거야.
11개월 차 중반 무렵, 나는 책임과 1:1 면담을 자주 했다. 책임이 부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내가 먼저 요청했다. 내가 싫어하던 책임에게 면담을 요청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에게 부사수가 생겼기 때문.
부사수 유니(가명)는 나보다 3살 많은 언니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경력은 없어 신입과 같았다. 원래 유니는 A브랜드의 부사수로 입사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될 거라며 유니에게 B브랜드 키즈몰을 넘기라는 명이 떨어졌다.
다음 달까지 인수인계 끝내. 나랑 새로운 프로젝트 해야지.
통보였다. 책임은 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게 될 거라고 통보했다. 아무리 회사가 직원 사정을 일일이 봐주는 곳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담당 업무를 바꾸라 하니 난처했다. 나중에 수석님께 들어보니 책임이 내가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단다. 그러니 회사의 뜻도 아니었다는 거지. 정말 책임은,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아무튼. 어차피 나도 슬슬 같은 일만 하는 게 지겹기도 했고, 인수인계가 처음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조금 걱정되었던 건, 인수인계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내가 맡은 업무가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고객사와 맞춰 일하는 게 까다로웠다. 왜,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레시피로 그 맛을 똑같이 구현해 내는 게 더 어렵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는 변수도 많은 데다가 고객사 직원들도 시스템을 잘 몰라 역으로 문의를 받는 일이 많았다. 나는 책임에게 다음 달까지 인수인계를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니가 A브랜드를 좀 했으니 괜찮을 거야.
책임은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유니는 이미 두 달 넘게 부사수로서 A브랜드 운영 업무를 하고 있었다. 브랜드마다 차이는 있어도 사용하는 시스템은 같으니 금방 적응할 것이란 게 책임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반신반의했다. A브랜드의 사수님께 유니가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왕왕 듣기도 했고, 어떻게 한 달여 만에 그 많은 변수를 이해시키나 싶었다. 그러나 회사가 누구의 사정을 봐주던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발, A브랜드에서 배운 것만큼은 제대로 하길 바라면서.
유니님. 엑셀에 #N/A 떠 있는데, 이대로 등록하신 거예요?
나는 유니에게 A브랜드에서 했던 것과 같은 업무부터 알려주었다. 이미 해봤던 업무라 그런지 유니도 다 할 줄 안다고 말했기에, 나는 브랜드 간의 차이점을 덧붙여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하지만 그건 내 오산이었다. 유니는 A브랜드에서도 아직 적응을 다 못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유니는 엑셀에 버젓이 오류 표시가 떠 있는데도 그걸 시스템에 등록했다. 덕분에 상품 정보에도 #N/A가 입력되었다. 머리를 땡 맞은 기분이었다. 유니는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걸 아주 잔인하게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엑셀로 상품 등록을 진행했다. 이미 초반에 수식을 넣어 템플릿을 만들어 놨기에 기본 자료만 복사해서 넣으면 자동으로 등록 파일이 완성된다. 그러나 가끔 자료가 잘못되거나, 실수로 수식을 건드리면 오류가 나기도 한다. 이대로 넣으면 상품 정보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전산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른 이슈가 터질 수 있었다. 그래서 만약 실수였다면 꼭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니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요. 이게 이렇게 표시되더라고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니는 등록 파일에 오류가 떴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에게 질문 하나 없이 등록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 외에도 유니의 독단적인 행동은 여럿 있었다. 오픈일 전에 배너를 전시한다던지, 검수가 안 됐는데 등록부터 해버린다던지. 이것이 우리 회사만의 문제면 괜찮은데, 우리는 대행사였다. 우리의 실수가 곧 고객사의 손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도 크게, 큰 것도 작게. 여러 각도에서 자세히 볼 필요가 있었다. 이건 내가 2억을 날리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기도 했다.
당황하고 황당했지만, 일단 참았다. 그럴 수 있지. 등록 후에 물어봐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나는 감정을 눌러 담고 조곤조곤 타일렀다. 엑셀에 오류가 있을 때 왜 등록하면 안 되는지부터 어떤 오류였는지 까지. 하지만 쉽게 고쳐지면 그게 사람인가, 기계지. 유니는 매번 자신의 작업을 검수하지 않고 무단으로 고객사에 완료 회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수습과 사과는 나의 몫이었다.
네가 있어서 그래. 원래 위에 누가 있으면 설렁설렁하게 돼.
나는 책임에게 '또' 면담을 요청했다. 책임은 '또' 나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원래 바리케이드가 있으면 '어차피 그 사람이 확인하겠거니' 하는 마음에 풀어진다는 이야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백히 돈을 받고 일하는데, 설렁설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그리고 유니는 내가 확인하기도 전에 멋대로 완료 회신을 날렸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사고를 벌이는 것이었다.
네가 뭔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겠지.
책임은 '또' 나를 탓했다. 물론, 나의 인수인계 방식이 잘못된 걸 수도 있었다. 너무 A to Z로 상세하게 알려주고, 너무 세심하게 검수해줘서 내게 기대게 된 걸 지도 몰랐다. 그러나. 업무를 몰라서 내는 실수보단, 안 해서 나는 실수가 더 많은 건 문제였다.
유니는 늘 정각보다 조금 늦게 출근했고, 정시에 퇴근했다. 당일 마감인 업무가 끝나지 않았어도, 그날 작업했던 것들에 오류가 있어도, 시간이 되면 퇴근했다. 한 번씩 업무를 설명해주러 자리에 가면 꼭 한창 카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낸 채팅은 읽지도 않으면서, 친구들의 카톡은 꼬박꼬박 읽었다.
이 정도면 그냥 일하기 싫은 거 아닌가요?
나는 유니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대신 책임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구는 건가 싶어서 객관적인 입장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책임은 무조건 유니 편을 들었다. 자신이나 내가 워커홀릭인 게 특이한 거라나. 자신도 내 마음을 이해하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라떼 이야기나, 여러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 무엇 하나 영양가가 없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가르쳐 볼 일이 어디 흔하니.
책임은 좋은 기회라고 했다. 좋은 기회는 맞았다. 사회에 일찍 뛰어든 나는, 앞으로 얼마든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 후임을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미리 경험해보면 노하우가 쌓일 테니 좋은 기회는 맞지. 그래서 더 걱정됐다. 내가 지금 여기서 실패하면, 앞으로도 실패할 것 같아서.
결국, 나는 '또' 별다른 수확 없이 면담을 끝냈다. 면담 후에도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많이 내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유니가 어렵지 않게 이 업무에 적응할 수 있을지. 자료도 정리해서 보내주고, 옆에 붙어서 설명해주기도 하고, 한 번은 직접 해보라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주기도 했다. 간혹 오류 없이 일처리가 되면 꼭 칭찬을 덧붙였다.
그러나. 스스로 업무에 정을 못 붙이고 나태해져 가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이번 방법도 틀렸다는 거겠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봐. 네가 아직 인수인계가 서툴러서 그래.
유니의 근무태만에 대해 말하자, 책임은 '또' 나를 탓했다. 나는 그 말에 울컥 감정이 솟아올랐다. 또? 또 제가 잘못한 거예요? 나는 되묻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여긴 학교가 아니었으니까, 무작정 내 탓이 아니라고 떼를 쓸 순 없었다.
이제 제가 뭘 더 가르쳐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겨우 차분해진 목소리로 책임에게 되물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책임이 해보라던 방법도 써봤고, 나름 내가 생각해본 방식도 적용해봤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게 없었다. 이쯤 되니 정말 의문이었다. 스스로 책임감을 포기한 사람에게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는 걸까.
좀 더 생각해 봐. 원래 인수인계가 젤 어려워.
너는 안 그랬는 줄 아니? 나도 너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6개월 동안.
뚝. 뒤틀려가던 철사가 기어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책임이 나를 가르치려고 고생을 했단다. 그것도 6개월씩이나. 물론 내가 쳤던 사고도 있으니 그가 아예 고생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배경지식도 없는 신입을 가르치는 건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그 뒷말에 심기가 뒤틀렸다. 6개월? 그가 직접적으로 날 가르친 건 약 한 달 정도. 그 이후엔 책임을 회피하느라 급급했던 그가 무려 6개월을 고통받았다 언급했다. 처음으로 욕을 내지를까 주춤했다.
6개월이요? 저 두 달 만에 적응 다 했는데요?
그리고 저는 모르면 바로 물어봤도, 매일 제일 먼저 오고 제일 늦게 갔어요. 아시잖아요.
나는 정말 모르는 것이냐는 듯 되물었다. 일을 못해서 야근했다는 게 자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내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다. 보란 듯이 잘 적응하기도 했고. 그런 나에게 무책임한 사람과 똑같았다는 듯이 말하니 기분이 상했다.
내 말에 책임은 곧장 말을 뒤바꿨다. 자기가 잘 가르친 것이라느니, 내가 특이한 거라느니. 그래, 내가 특이한 건 맞다. 자존심 그거 좀 건든다고 독기가 바짝 올라 죽도록 했으니. 그걸 의도하고 그렇게 욕했던 거라면 잘 가르친 거긴 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말은 그게 아니었다.
결국, 또 면담은 흐지부지 나의 탓으로 끝났다. 적응할 시간을 주자는 말도 나왔다. 한 한 달만 참아보라나. 그래서 참았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최대한 감정을 빼고 대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사람으로서 싫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 참아서 문제였던 걸까. 나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책임과의 면담에서 결국 진심을 토해내고 말았다. 한 순간의 일이었다. 또 나를 탓하고 나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책임의 말에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나는 결국, 내가 가장 싫어하던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자 책임은 말없이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멋쩍었는지 고생한다느니, 괜찮다느니 그런 위로 아닌 위로의 말도 덧붙이면서.
그때는 이제 막 11개월 차를 넘어, 1년 차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나는 민망한 내 속도 모르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지난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탓했다. 그때 나는 너무 힘들었고, 지쳐 있었다. 그래, 이게 다 '그 일' 때문이었다. 내가 그의 앞에서 울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사실 몇 가지 일을 더 설명해야 했다. 마음이 심란했던 일이라면 이 일이 가장 컸다.
나는, 1년 차가 됐던 날. 난생처음 시말서를 썼다.
*본 글은 시리즈로, 이야기가 다음 회차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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