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제가 만든 템플릿인데요
칠리님! 상품 등록 파일, 저만 오류 뜨나요?
내가 2년 차를 채우기까지 약 4개월이 남았을 무렵. 고객사는 자사몰 운영에 필요한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 발 빠르게 프로세스를 바꾸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동료 중 한 명은 퇴사 날을 기다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새로운 프로세스로 인수인계를 진행하기 위해 동료는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가 나에게 채팅을 보냈다. 새로 만든 상품 등록 파일이 오류가 난다며,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우리는 업무 특성상 엑셀 파일을 자동화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보니, 사용하다가 실수로 수식을 망가트리는 일이 왕왕 일어났다. 나는 그런 건가 싶어 빠르게 동료가 사용한 엑셀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웬걸. 익숙한 템플릿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혹시 누가 제작한 거예요?
나는 곧장 동료분께 물었다. 그러자 책임이 만들어주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동료분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책임이 자동화 파일을 많이 만들어 왔기 때문에 동료분이 사용하고 있는 파일을 책임이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내가 만들었던 템플릿과 같은 폼이었다는 것이다.
책임님! 이번에 시스템 바뀌어서 자동화 파일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새로운 시스템의 시범운영이 시작되었을 무렵,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빠르게 자동화 파일을 업그레이드하려고 했다. 그래야 업무가 밀리지 않으니까. 자동화 파일은 늘 책임의 몫이었고, 애초에 책임도 자기보다 엑셀을 잘 하는 사람은 없다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나 또한 책임에게 먼저 요청했었다.
네가 좀 만들어 봐~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책임은 넌지시 나에게 떠넘겼고, 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쪼개며 자동화 파일을 만들었다. 본래 엑셀의 ㅇ자도 모르던 나였기에, 초록 창과 파란 창을 열심히 뒤적여가며 수식을 짜냈다. 그렇게 어찌어찌 템플릿을 만들어 테스트도 해보고,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책임에게 최종 확인 요청을 했다. 아무리 게으르다고 해도, 엑셀에 대한 짬은 있으니 그에게 확인받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잘 했겠지 뭐.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그 뒤로 확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불확실했다. 나는 그럼 그렇지, 싶어 스스로 몇 번 더 테스트해 본 다음 바로 실전에 사용했다. 초반에 몇몇 오류는 있었지만 다 뜯어고쳐 '쓸만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내 담당 브랜드 운영을 위한 자동화 파일을 만든 첫 순간이었다.
뿌듯함과 동시에 조금 화가 났다. 책임은 나를 에이스라고 칭하고, 나를 믿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업무와 책임을 떠넘긴 게 아닌가. 어떻게 보면 운영에 필요한 자동화 파일쯤은 실무자가 만드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 책임에게 내려준 업무 중 하나가 그것이었고, 본인조차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는 다 떠넘겨 놓고, 다른 브랜드는 전부 제작을 해줬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나한테만 그러나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책임님. OO브랜드 상품 등록 파일 만들어주셨다면서요?
다른 브랜드도 만들어주셨다는데, 왜 저희 브랜드만 ㅠㅠ
나는 조금 친근한 말투로 책임에게 채팅을 보냈다. 대뜸 내 파일을 도용했냐고 할 수도 없고, 서운한 티를 내며 그가 도용한 파일을 자신이 만든 거라고 말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나.
너도 만들어줬잖아? 안 만들어줬어?
책임은 나에게 자신이 만들어주지 않았냐며 되물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못 하다가 조심스레 '제가 만들었는데요...?'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책임은 너털스럽게 웃으며,
그럼 됐네. 잘 만들었네. 파일 거의 이상 없던데? 한두 개 빼고.
하고 말했다. 내가 확인해달라고 보냈을 땐 피드백도 없더니. 이제 와서 자기도 조금 민망한 지 되려 지적질을 해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류가 없는 파일임에도 불구하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동료에게 자신이 만들었다며 전달한 파일은 내가 만든 파일의 복제품이었고, 그는 그것이 내가 만든 파일임을 알고 나서도 다른 브랜드용 파일을 만드느라 고생했다며 생색을 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나는 결국 무어라 더 말하지 못하고, 처음에 문의를 남겨주었던 동료분께 오류를 찾아 전달해 주었다. 책임이 해당 브랜드에 맞추느라 수식을 몇 개 변형하기는 했어도 결국 내가 짠 수식이었다. 그러니 오류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책임이 내 템플릿을 가져가 자신이 만든 것이라 말하고 다녔지만, 내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그의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되뇌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책임의 손을 완전히 벗어나려고 했다. 그에게 요청하는 일도 없었고, 요청받는 일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가 나에게 일을 떠넘길만한 접점 자체를 주지 않았다. 나는 하나둘씩 떠나가는 동료들 틈에서, 이 회사에서 버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몇 주 후. 충격적인 퇴사 소식이 들려왔다.
*본 글은 시리즈로, 이야기가 다음 회차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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