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공화국 | 이진우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늘 모자라다
공과금 내고 할부금 내고 은행 이자 내고나면
다시 대출받아야 하는
만성적자 가계부를 집어던진 게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 백기를 든 게 언제부터인가
돌이킬 수 없는 빚은
가족이 되고
피부가 되고 뼈가 되었다
이 시대가 선전하는 행복
그 이상으로 살아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기저기서 앞다투어 자선하듯
돈 빌려줄 땐 몰랐다
황금빛 미래를 담보로 맡기고
당당하게 대출받는 줄만 알았다
돈이 넘쳐나는 시대
돈으로 굴러가는 시대에 올라탄 채
쓰고 또 쓰는 즐거움에 미쳐 질주한 나날들이
목을 조르기 시작한 후로
맘대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모두가 빚
빚더미에서 자고
빚더미를 입고
빚더미를 먹으면서도
겉으론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채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휘황찬란한 미래만 선전하는
금융자본주의 생존법이 되었으니
누구나 이렇게 빚더미에 얹혀서
이자의 노예로 살다가
상환능력이 없어지면 자식에게 빚을 상속하고
이 세상을 떠야 하는 것인가하고 둘러보면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지게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데
행복한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넘쳐나는데
왜 생활은 빚더미에 눌려 앓는 소리만 내는 것이냐
앓는 소리를 내면
왜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웃는 얼굴로 짓밟으려 드는 것이냐
시집 {보통 씨의 특권}, 2015. 에서